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4/12/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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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
제 목
 폴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에 관한 소고
첨부파일
 f128-14-12-27.hwp (618 K)
 
 

※ 본 논문은 필자의 2014년 박사학위논문의 일부를 수정, 보완했음을 밝힙니다.

폴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에 관한 소고

백상훈 (한일장신대, 기독교 영성, loveeve@hanil.ac.kr)

국문초록

본고는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에 대한 연구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이 학문적 분과로서의 현대 영성학에 대한 개신교 내 수용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개신교 영성의 신학적 모델을 구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밝힌다.
먼저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배경적 맥락을 제공하기 위하여 그의 신비적 경험을 일별한다. 바다(발트해), 보티첼리의 그림, 그리고 니체의 잠언을 매개로 이루어진 그의 신비적 경험은 그의 신비주의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어서, 신비주의와 연관된 틸리히의 산발적 언술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위하여 삼중적 초점을 구성한다. 첫째, 그에게 신비주의는 종교적 체험의 한 범주이기도 하고 종교적 유형의 하나이기도 한데 종교적 유형으로서의 신비주의는 마성적 탈아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윤리성과의 변증법적 통일을 필요로 한다. 둘째, “세례받은 신비주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그의 고유 용어로써 오리겐-버나드의 사랑의 신비주의에 상응하는바 신성의 체현된 실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셋째, 틸리히식 신비가는 무한한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채 실존적 위협과 대면하는 가운데 무한한 존재를 향한 신비적 갈망을 바탕으로 삶의 다차원적 모호성을 점증적으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주제어: 신비주의, 영성, 틸리히, 사랑의 신비주의, 탈아


I. 들어가는 말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 시리즈 제 1권에서 저자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은 독일 개신교 전통은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의 자리에 관하여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평가해왔다고 진단하면서 폴 틸리히의 경우에는 좀 더 ‘복잡하다’(complex)고 말한다. 맥긴에 따르면, 틸리히는 평생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고 신비적 체험의 한 형태로써 궁극적 가치 혹은 존재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개별성을 소멸시키고 실존에 대한 마성적(demonic) 위협에 맞서는 것을 회피하며 종교의 역사적 구체성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유형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틸리히가 개신교 신학자이면서도 신비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맥긴의 평가는 여러 틸리히 연구자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월터 라이브레히트(Walter Leibrecht)는 틸리히가 고전적 의미의 신비 신학자이며 그의 신학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신비적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틸리히의 기독교 사상사 강의를 편집한 칼 브라아텐(Carl Braaten)은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교리는 신비주의적 존재론의 골격 안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지고 틸리히의 주요 개념들, 곧 “유신론적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 “존재 자체,” “절대적 믿음,” “탈아적 자연주의” 등을 이해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프레데릭 파렐라(Frederick Parrella)는 1994년에 출판된 소논문에서 틸리히의 신학은 그 자체로 영성이며 작금의 영성 르네상스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파렐라에 따르면, 틸리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직접성(immediacy)과 자기(the self)에 대한 앎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설파하는 고전적 신비주의자들의 존재론적 관점을 회복한다.
그러나, 맥긴이 지적한대로, 틸리히는 신비주의를 긍정하면서도 특정한 유형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맥긴이 상술하지 않는바 틸리히의 비판의 이면에 놓인 문제의식은 신비주의가 기독교와 통일을 이루는 게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어떠한 원형적 특징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맥긴의 평가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써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1886-1965)의 신비주의 이론에 대한 개론적 이해를 도모한다. 틸리히는 “세례받은 신비주의”(baptized mysticism)라는 고유 용어를 사용하여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와는 구별되는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기독교 신비주의는 오리겐-버나드 계통의 ‘사랑의 신비주의’로써 신비성(the mystical)과 윤리성(the ethical)의 통일이다. 사랑의 신비주의 안에서 개별적 자기는 신적인 존재의 심연 속에서 개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해간다. 그에게 신비주의는 실재하는 가능성이지만 인간 실존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항상 파편적이고(fragmentary) 기대적이다(anticipatory).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개괄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 먼저,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배경적 맥락을 제공하기 위하여 그의 신비적 경험을 일별한다. 이어서 그의 신비주의 이론의 삼중적 초점(threefold focus)을 구성, 논구함으로써 신비주의와 연관된 그의 언술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의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의의를 영성학적 관점에서 약술할 것이다.

II. 틸리히의 신비적 경험

틸리히에 관한 전기와 그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가 신비성(the mystical)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이비드 니켈(David Nikkel)은 틸리히의 신비적 경험을 다루는 글에서 자연,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예술이라는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하는데, 본고는 니켈의 연구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면서 틸리히의 신비적 경험을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자연 신비주의, 아름다움의 신비주의, 그리고 존재의 신비주의.

1. 자연 신비주의(mysticism of nature)

생애 후반기인 1957년 가을 히사마츠 신지(Hisamatsu Shin’ichi) 선사와 가진 대담에서 틸리히는 자신을 “자연 신비주의자”(a nature mystic)라고 소개한다. 이는 그의 생애 동안 유지되었던 자연에 대한 신비적 감수성을 고려할 때 정당한 듯 보인다. 틸리히는 어린 시절의 많은 좋은 추억들은 흙, 밭, 바람, 구름, 그리고 숲과 연관된다고 말하면서 자연과의 관계를 기술하기 위하여 “신비적 참여”(mystical participation)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해마다 몇 달씩은 자연과의 실제적인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많은 기억할만한 자연에의 “신비적 참여”가 유사한 상황에서 반복된다.” 그에게 자연은 관찰, 개념화, 혹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참여하는 실재이다. 자연에 대한 신비적, 참여적 태도는 1911년경 그가 나우엔(Nauen)에서 부목사로 일할 때 행했던, 야콥 뵈메적인 설교에서 시적인 언어로 변환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창조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몸은 전 세계입니다... 영원한 법칙을 따라 서로의 주위를 도는 수백만 개의 태양들을 거느린 우주가 바로 그의 몸인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볼 수 있게 하는 빛,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들, 영과 영을 이어주는 말들, 우리를 안아 양육하는 대지, 우리를 따듯하게 하면서 섬기는 불, 우리를 새롭게 하는 물-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움직임이요 하나님의 되어감(becoming)입니다.

틸리히의 신비주의적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데 특별한 역할은 한 것은 바다(발트해)이다. 사망하기 2년 전인 1963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그는 자신이 종교성(religiosity)의 지시어로써 사용해 온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은 바다 경험을 통하여 착상되고 확증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발트해를 바라보면서 무한의 힘에 사로잡히곤 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한과의 경계선상에 현존하는 무한에 대한 경험은 경계선 상황(boundary situation)을 향한 나의 내적인 끌림과 잘 맞아떨어졌고, 나의 정서에는 요체를 나의 사유에는 창조성을 선사한 어떤 상징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인간의 경계선 상황에 대한 나의 이론은 지금과 같은 상태로 발전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또한 바다는 역동적 진리의 근원이자 심연으로서의 절대(the Absolute) 그리고 영원(the Eternal)의 유한성으로서의 침투라는 종교의 실체에 대한 교리들을 구상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위의 기술에서 두 가지 점이 특기할 만하다. 첫째, 틸리히에게 무한자 곧 하나님은 유한자와의 경계선에서 현존하는데 이 무한자의 경험은 “경계선상에서의 삶”(living on the boundary), 곧 유한자로서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 위협을 제거하려 하거나 타율적인(heteronomous) 권위, 이데올로기 혹은 제도 안에서 안전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 위협과 대면하는 삶을 견인한다. 틸리히식 신비가의 실존은 긴장과 운동으로 가득 차 있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기보다는 경계를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계 지어진 영토 너머의 제 3의 영토를 창조한다. “경계선”이라는 개념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될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삼중적 초점과 관계되는데 그가 제시하는 기독교 신비주의는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라는 실존적 한계를 용기와 믿음으로 대면하여 살아가는 삶을 포함한다.
둘째, 틸리히에게 절대자는 존재의 근원(ground)이자 심연(abyss)이고 절대자 경험은 존재의 근원과 심연에의 경험으로써 신비(mystery)의 경험이다. 심연(독일어, Abgrund)은 신적인 생명(the divine life)의 무궁무진하며 형언할 수 없는 성격을 표현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존재의 근원이자 심연에의 경험은 영원의 유한성으로의 침투에 대한 경험으로써 종교의 실체를 구성한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될 그의 주장, 곧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은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라 신비적 참여요 의지의 연합이라는 점은 바로 이와 같은 틸리히의 하나님 경험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아름다움의 신비주의(mysticism of beauty)

1914년에서 1919년까지 군종장교의 신분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틸리히는 인간 실존의 공포와 추악함을 직면하면서 세 번 기절하고 한 번은 병원신세까지 져야 했을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그는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싸구려 복사본 그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받은 위로는 전쟁의 파괴적이고 공포스러운 효과에 대항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그림들 중 하나가 상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마돈나와 아기, 그리고 노래하는 천사들>이다. 종전 무렵 외출을 나와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 박물관에서 복사본이 아닌 원본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틸리히는 실재의 감추어졌던 경지가 확 열리는“계시적 탈아”(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한다.
이 그림에서 다소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무관심해 보이기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머니의 품에 꼭 붙어 있으려 하면서 관찰자 혹은 외부세계를 응시하는 아기의 담대함과 대조를 이룬다. 그림을 보는 순간 틸리히는 깊은 관상으로 빠져들었다.

“신적인 계시(divine revelation)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36년 전 어느 순간 찾아왔다... [그 그림을] 응시하면서 나는 탈아(ecstasy)에 근접하는 상태를 느꼈다. 그림의 아름다움 속에 아름다움 자체(Beauty itself)가 있었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오래 전 마음속에 품었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채 거기에 서 있을 때 모든 것들의 신성한 기원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나에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몸이 떨려 심히 흔들렸다. 그 순간은 나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쳤고 인간 실존의 해석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으며 생명력 넘치는 기쁨과 영적인 진리를 가져왔다. 나는 그 경험을 종교적 언어로 보통 계시라고 불리는 것에 비교하고 싶다... 이 경험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실재와 조우하는 방식을 넘어선다. 다른 식으로는 경험될 수 없는 심층(depths)을 열어젖힌다.


“아름다움 자체”의 경험에 대한 틸리히의 기술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이 이해하는 탈아(ecstasy)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언더힐에게 탈아는 관상의 특별한 종류로써 육체적, 심리적, 그리고 신비적 측면을 포함한다. 첫째, 탈아적 경험에서 경험의 주체의 몸은 다소 차갑고 경직되어 탈아가 시작되었을 때의 바로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며 숨과 혈액순환이 억제된다. 틸리히의 경우, 보티첼리의 그림으로부터 발산되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채” 서 있었고 “몸이 떨려 심히 흔들렸”으며, “생명력 넘치는 기쁨”을 향유했다. 둘째, 심리적 차원에서 보자면, 주체는 외부세계로부터 의식을 완전히 철수시킨 채 “의식의 일시적인 통합”을 획득한다. 틸리히의 의식은 그림에 대한 관상의 순간에 순수한 집중 상태에 이르러 그림 속의 색조를 통과하는“아름다움 자체”를 지각하였다. 셋째, 신비적 차원에서 탈아는 “순수한 존재”(pure being)의 방향으로 영적 의식이 최대한 확장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탈아적 경지에서는 신적인 실재에 대한 최상의 지식을 얻거나 혹은 신적 실재에 참여하게 된다. 탈아적 의식은 일상적으로 지식을 매개하는 방식을 초월하여 그 경험자를 실재의 중심(heart of reality)으로 밀어 넣는다. 날아갈 듯한 기쁨(exaltation)과 생기의 증진이 그/그녀에게 일어난다. 틸리히의 경우, 그가 실재의 “심층”이라고 부른, “모든 것들의 신성한 기원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그에게 열렸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지식을 말한다기보다는 신적인 실재에 사로잡히는 관상적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실재(reality)와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얻었다.
틸리히의 아름다움의 신비주의는 그가 개신교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를 종교와 종교성의 필수적인 요소로써 이해하면서 그것을 그의 신학의 기초로 삼게끔 만든 중요한 경험이다. 다음 장에서 상술하겠지만 그에게 신비주의 혹은 신비성(the mystical)은 종교적 체험의 기본적인 범주(category)이다. 신비성은 그가 경험했던 “계시적 탈아”에 대한 개념적 표현으로써 실존적인 개별자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분리를 넘어서 자기 존재의 근원이자 심연인 신적인 현존으로 개방되는 체험적 계기 혹은 과정을 지시한다.

3. 존재의 신비주의(mysticism of being)

1915년 샴페인(Champagne) 전투에 참가하던 어느 날, 틸리히는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던 관념론적 이상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인지하였다. “존재의 신비주의”는 이 인식과 동반된 그의 경험을 가리킨다. “예술과 사회”(Art and Society)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계시적 성격의 탈아적 느낌을 만들어낸 바로 그 방식으로 외견상 추상적으로 보이는 존재(being)라는 개념과의 특별한 만남은 유사한 경험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존재 자체의 힘(the power of being itself)과의 만남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것은 뭔가가 존재한다는 그리고 무(nothing)가 아니라는, 내가 존재에의 힘에 참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astonishing) 인식이었다. 이런 사실이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만들었다.

틸리히가 위의 기술에 나오는 존재의 경험과 보티첼리의 그림에 대한 관상으로부터 나온 아름다움의 경험을 유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존재의 경험 역시 계시적이요 탈아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험은 그가 나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비상징적(non-symbolic) 개념이라고 여겼던 “존재-자체”(being-itself)와의 신비적 만남이자 존재-자체의 힘에 참여하는 자기 존재와의 경험을 포괄한다. 존재-자체로서의 하나님은 전통적인 유신론적, 인격적 하나님 개념을 넘어서는바 실존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인도하는 존재의 힘이다. 틸리히의 존재의 신비주의는 그의 신학적 개념인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를 통해서 상술된다.
1952년에 출간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은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틸리히는 루터와 개혁자들이 보여준 확신은 하나님의 무한정성과 인간 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받아들임(acceptance)이다. 무의미함과 죄의식, 그리고 죽음과 같은 비존재(nonbeing)의 위협은 여전하고, 인간의 실존은 깨어지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상태, 그것이 믿음이다. 틸리히는 이를 두고 “절대적 믿음”이라고 말한다. 절대적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the God above God)이다. 이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적인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없는 어둠”이요 하나님에게 부여된 이름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힘이다.
그렇다면 틸리히는 실제적으로 언제 “존재”를 경험했던 것일까? 1959년에 이뤄진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군종장교로서 프랑스의 삼림지역에서 복무하던 중(1917년)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들을 읽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프랑스의 숲 속에 앉아 많은 다른 독일 군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날아갈 듯한 기쁨(exaltation)의 지속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것은 타율성(heteronomy)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였다.” 이 기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니체를 읽으면서 “날아갈 듯한 기쁨의 지속적 상태”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니체를 읽는 동안 의식의 고양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지속적” 그리고 “날아갈 듯한 기쁨,” 이 두 단어의 결합은 이 경험이 그가 1952년 강의에서 “계시적 성격의 탈아적 느낌”이나 “존재-자체의 힘과의 만남”과 같은 문구를 사용하면서 묘사했던 그 경험, 말하자면 보티첼리의 그림을 관상하던 중 일어났던 경험과 같은 종류라고 유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리차드 휴즈(Richard Hughes)는 틸리히를 무아지경의 기쁨의 상태로 이동시켰던 그 책의 특정 부분은 “자정의 노래”(Midnight Song)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자정의 노래”의 끝부분이 1917년 대림절 첫째 주일에 틸리히가 행한 설교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희열은 모든 영원을, 깊고 심오한 영원을 사모합니다. 당신 안에서 내겐 희망이 있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 영원이여.” 휴즈의 추측은 좀 더 많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틸리히의 존재의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바는 그가 니체를 읽던 중 경험한 것이었고, 따라서 니체의 생명철학이 틸리히의 신비적 감수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III.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삼중적 초점

틸리히는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기초로 자신의 생애 내내 신비주의에 관한 강의와 저술을 지속하였지만 신비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신비주의 이론에 대한 연구는 구성적(constructive)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그의 신비주의에 관한 언술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그의 신비주의 이해의 삼중적 초점(the threefold focus)을 구성하고자 한다. 삼중적 초점을 기초로 그의 다양한 저술 속에 들어 있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언술들을 분석하는 일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본고는 삼중적 초점을 구성함으로써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개괄적 면모를 살피는 일에 한정하고자 한다. 삼중적 초점은 다음과 같다. 1) 틸리히의 인식 속에서는 범주로서의 신비주의와 종교 유형으로서의 신비주의가 구분된다. 2) 틸리히는 신비성(the mystical)과 윤리성(the ethical)을 종교의 필수적인 두 요소로서 간주하면서 양자의 변증법적 통일을 종교성 혹은 종교적 삶의 이상으로 제시하는데 이의 지시어가 “세례받은 신비주의”(baptized mysticism)이다. 3) 틸리히에게 신비주의는 항상 “파편적”(fragmentary)이고 “기대적”(anticipatory)이다.

1. 범주로써의 신비주의와 종교 유형으로써의 신비주의

틸리히는 신비주의를 종교의 한 범주(category)로써 이해하는 동시에 종교의 한 유형(type)으로써 간주한다. 이 구분은 그의 생애 후반기에 나타나는데, 먼저, 그의 『조직신학』 제 3부에서 발견되는 범주로써의 신비주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에게 신비주의는 종교와 종교 경험의 필수적 범주이다.

“신비적”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경험 가운데 현존하는 신적인 것(the divine)을 특징짓는 범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비성(the mystical)은 모든 종교가 종교로서 갖는 핵심이다. “하나님 자신이 현존한다”라고 말할 수 없는 종교는 본래 계시적인 기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혹은 교리적 규칙의 체계이지 종교적 규칙의 체계라고 할 수 없다. 신비주의 혹은 “하나님에 대한 느껴진 감각”(the felt sense of God)은 종교의 본성에 필수적인 범주이고 자력-구원(self-salvation)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위의 기술에서 “경험 가운데 현존하는 신적인 것”이라는 틸리히의 표현은 설명을 요한다. 이는 신적인 것이 하나의 객체로써 주체인 인간 안에 공간적으로 자리한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신적인 것의 공간화(spatialization)와 술어화(predication)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다. 신적인 것, 곧 하나님은 공간화되거나 객관화될 수 없는 존재-자체이다. “신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경험은 주체와 객체의 간극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비적이고, 이 초월이 발생할 때마다 범주로써의 신비주의가 주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범주로써의 신비주의는 틸리히가 “하나님에 대한 느껴진 감각”이라고 부른바 신적인 것에 대한 경험의 특질로써 주체-객체 구조의 초월을 가리킨다. 범주로써의 신비주의는 모든 종교적 경험의 특질(quality)이므로 개신교 신학 안에서 배제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에 따르면, 신비주의의 배제는 네 가지 효과를 낳는다. 1) 종교가 지적인 신앙과 도덕적 사랑으로 축소된다. 2) 예수의 말씀을 강조한 나머지 예수의 존재와의 신비적 연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3)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된다. 4) 칸트-리츨(Ritschl) 계열의 신학에서 드러나듯,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에의 성애적 참여(erotic participation)의 요소의 제거된다. 틸리히는 이를 가리켜 “신비주의 공포증”(mysticophobia)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범주로써의 신비주의와 구별되는 종교 유형으로써의 신비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틸리히의 종교철학 유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초기 종교철학에서 두 개의 기본적인 종교적 태도는 성사성(the sacramental)과 신정성(the theocratic)이다. 성사적인 유형의 종교에서는 특정한 물건, 존재, 그룹, 제도, 국가, 혹은 권위가 거룩한 것(the holy)으로 이해되고 그러므로 거룩한 것은 지금 여기에 현존하며 붙잡을 수 있는(graspable)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성사적 종교 안에는 마성화(demonization)의 가능성이 있다. 마성화는 틸리히의 종교철학과 신비주의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인데 이 개념은 그의 초기 종교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거룩함 자체의 영역으로부터 신성성(the divine)과 마성성(the demonic)이라는 양극이 나온다. 마성성은 마이너스(-)표시가 붙은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 곧 성스러운 반신성성(the sacred antidivine)이다. 마성성의 가능성은 형식과 내용의 독특한 관계에 내재한다: 의미 내용(the import of meaning)의 무궁무진함(inexhaustibility)은 한편으로는 의미의 모든 형식의 유의미성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식에 대한 물질(matter)의 끊임없는 저항을 전제한다.

본성의 심층에 내재하는 존재의 형식과 존재의 무궁무진함(의미내용)의 연합이 거룩함이요, 실존 가운데 그 양자의 분리, 곧 심연(the abyss)의 독립적인 분출(eruption)이 마성성이다. 모든 사물이나 존재 안에는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의 활동적인 무한성을 실현하려는 의지, 자신의 한계 지워진 형식을 뚫고 나오려는 충동, 심연 자체를 실현하려는 갈망,” 곧 마성성이 있는데 이것이 거룩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양자의 연합을 위협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파괴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것을 틸리히는 마성화라고 부른다. 그가 이해하는바 성사적 종교는 특정한 현실이나 형식을 거룩함의 담지자로 간주하거나 심지어는 거룩함과 동일시한다. 그렇게 간주되거나 동일시되는 구체적이고 유한한 물체는 동일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물체들과의 파괴적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다신론(polytheism)과 국가주의(nationalism)가 마성화의 좋은 예이다. 어떤 신 혹은 어떤 국가가 궁극성을 주장하게 되면 이는 다른 신이나 국가와의 충돌을 가져오고 급기야 다른 신이나 국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성사적 종교가 갖는 마성화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틸리히는 이에 대한 비판적 운동으로써 신비주의를 언급한다. 그에게 신비주의는 모든 형식들을 넘어서 무궁무진한 의미의 내용과 동일시되려는 욕망의 표현으로써 “급진적 탈아”(radical ecstasy)이다. 성사적 종교에서 거룩함은 어떤 구체적인 것 안에 현존하지만 신비적 종교에서 구체적인 것(형식)은 초월된다. 신비적 종교는 모든 유한한 형식, 예를 들면 거룩함을 담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물체들을 파기함으로써 성사성에 내재한 마성화의 가능성을 극복한다. 요컨대 신비주의는 성사적 종교의 마성화에 대항하는 비판적 운동이다.
그런데, 틸리히에 따르면 신비주의도 마성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거룩함의 경험에 있어서 구체적인 물체나 존재를 부정하면서 심연(the abyss)의 거룩함 자체(the holy itself)를 향하여 관통하려는 신비주의적 경향성은 마성성의 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격(personality)의 파괴를 종종 유발한다. 마성성은 인격을 공격하여 분할시키고 인격의 통일성과 자유를 파괴한다. 거룩한 탈아(divine ecstasy)는 존재의 고양, 창조적이고 형성적인(formative) 힘을 가져오는 반면, 마성적 탈아(demonic ecstasy)는 존재의 해체와 소멸 그리고 완전한 무의미함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신비적 유형의 종교는 성사성으로부터 발원하는 또 하나의 종교적 경향성인 “윤리성”(the ethical) 혹은 “예언성”(the prophetic)을 필요로 한다.
윤리성 역시 신비성과 마찬가지로 성사성에 대한 비판적 운동이지만 신비성과는 다른 양상을 갖는다. 윤리성의 자리는 성사성이 거룩함의 이름으로 정의(justice)를 부정하는 곳이다. 윤리적 유형의 종교에서 요청되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 질서, 인격의 윤리적 형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다. 거룩함은 “요청”(what ought to be)으로써 경험된다. 궁극자를 향한 모든 매개를 초월함으로써 구체성(the concrete)을 상실하는 신비주의적 종교와 달리 유대교와 같은 윤리적 유형의 종교는 정의 그 자체이면서 다른 모든 것을 심판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를 강조한다. 그런데 윤리적 종교 역시 한계를 지닌다. 이 한계는 거룩함의 현존으로 간주되는 무한자의 요청과 법에 대한 집착에 기인하는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명령-복종 관계로 전락하고 거룩함은 의로움(righteousness)으로 축소된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신적인 명령은 도덕적 완성(moral perfection)에 대한 요구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도덕적 완성은 이상이지 현실이 될 수 없으므로 실제로 거룩함(the holy)의 관념은 종교 안팎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와 같은 윤리적 종교의 한 예가 “마성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칼빈주의이다.

마성(the demonic)에 대한 두려움이 신적인 거룩함에 대한 칼빈의 교리에 퍼져있다. 부정한 것에 대한 거의 신경증적인 불안이 후기 칼빈주의에서 발전된다. “청교도”(Puritan)라는 말이 이러한 경향을 지시한다. 거룩함은 깨끗한 것이다; 깨끗함이 거룩함이 된다. 이것은 거룩함의 누미노스적(numinous) 성격의 종말을 의미한다. 떨림(tremendum)은 법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되고 끌림(fascinosum)은 자기절제와 억압에 대한 자랑이 된다. 많은 신학적인 문제들과 심리치료적인 현상이 거룩함과 부정한 것 사이의 대조의 모호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틸리히가 이해하는바 윤리적 유형의 종교 안에 내재한 한계는 마성에 대한 억압과 관련된다. 마성(the demonic)은 신성성(the divine)과 통일되어야 하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마성을 억압하거나 제어하려는 시도는 거룩함(the holy)의 경험을 축소하거나 제한한다. 마성에 대한 억압은 금욕주의의 강박적 차원, 곧 인간의 욕망과 에로스적 충동에 대한 경멸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윤리적 종교의 한계는 신비성의 보완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2. 신비성과 윤리성의 통일로써의“세례받은 신비주의”(baptized mysticism)

“세례받은 신비주의”(baptized mysticism)는 신비성과 윤리성의 통일을 지시하는 틸리히의 독특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그의 후기 저술에 그것도 몇 차례 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이 용어 이면의 문제의식은 그의 박사논문에서부터 마지막 강의에 이르기까지 유지된다. 이 용어는 『조직신학』 제 3부, 기독론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틸리히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모호함(ambiguity)을 극복하여 새로운 현실(new reality)을 초래하는 힘, 곧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초래될 수 없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새로운 존재”의 힘에 의존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자력구원(self-salvation)의 다양한 시도가 종교사 가운데 발견되는데 그 중 하나가 신비주의적 자력구원이다. 신비적 유형의 종교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수행을 통해서 신성과 연합되는 상태에 이르려고 하지만 이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진정한 탈아적 연합은 자력구원적인 시도에 의해서 강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받은 신비주의”(baptized mysticism)라고 부를 만한 게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세례받은 신비주의 안에서 신비적 경험은 새로운 현실의 출현에 의존되어 있지 그것을 창출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유형의 신비주의는 구체적(concrete)이어서 고전적인 신비주의 체계의 추상적 신비주의(abstract mysticism)와 대조된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예수 안에”(in Christ) 있는 경험, 곧 그리스도이신 성령의 힘 안에 있는 경험과 같다. 원리적으로 보자면, 그러한 신비주의는 자력구원의 태도를 넘어선다.

위의 구절에서 두 가지가 분명해 보인다. 첫째, 틸리히는 자신이 제안하는 기독교 신비주의는 “구체적” 성격을 지시하기 위하여 “세례받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세례받은 신비주의는 “추상적 신비주의”와 대조되는데 후자는 무한자와 연합하기 위하여 유한한 존재의 모든 영역을 초월하려고 하는 반면 전자는 실존의 조건 자체를 초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인 하나님됨-사람됨”(the essential God-manhood)의 구체적, 역사적 체현(embodiment)이기 때문이다. 둘째, 틸리히는 세례받은 신비주의를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경험에 연결시키는바, 세례받은 신비주의는 성령이신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신비주의이다.
틸리히는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과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의 사상에서 세례받은 신비주의의 형성 과정을 목도한다. 1953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에서 틸리히는 아가서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교적 해석은 하나님과 국가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있었다면 오리겐은 그리스도와 개체적 영혼(individual soul) 사이의 신비적인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오리겐은 신성과 인간의 영혼 사이의 신비적 결혼이라는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을 끌어들여 기독교식 신비주의를 만들어내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영혼이 자신을 벗어나 신성의 심연(the abyss)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신성의 구체적 현현인 로고스(Logos)가 영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신비주의가 “세례 받는다”라고 부르는 과정의 처음 단계이다. 신비주의는 구체적(concrete)이 됨으로써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오리겐 그리고 그 후에 끌레르보의 버나드가 로고스와 영혼 사이의 신비적 결혼에 대해서 말할 때, 중심화된 인격(the centered personality)은 파괴되지 않는다. 인격은 유지되어 [남녀 사이의] 결혼에서처럼 파괴되지 않은 채 온전한 연합을 이룬다.

틸리히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로고스는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신성의 체현된 실재(embodied reality)이다. 로고스는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몸”(body)이 되었다. 개체적 영혼과 체현된 로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적 연합에서는 개별적 영혼의 “중심화된 인격” 곧 개별적 자기의 구체적인 성격이 보존된다. 여기서 구체적 성격이란 개별적 자기의 이성적 구조를 포함한다. 이 구체성으로 인하여 영혼과 로고스, 양자는 동일화(identical)되는 게 아니라 연합(united)한다. 신비적 연합에서 신비가의 이성적 구조는 파괴되지 않고, 주체성을 상실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완성한다.
틸리히는 버나드의 신비 사상에서도 세례받은 신비주의의 실례를 발견한다. 그는 버나드의 신비사상에 관한 강의에서 버나드의 신비주의의 삼중적 운동, “숙고”(consideration), “관상”(contemplation), 그리고 “탈아”(excessus) 가운데 탈아는 존재의 근원과의 연합의 단계라고 설명한다. 물 한 방울이 포도주 잔에 떨어지듯 신비가는 신성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물 한 방울의 형식(form)은 모든 것을 포섭하는 신성의 형식(form)에 용해되지만 개별적 실체(substance)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신비가는 거룩한 실재(divine reality)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의 한 부분(part)이 된다. 신비가가 거룩한 실재의 한 부분이 된다는 의미에서 신비적 참여(participation)이다. 물과 포도주라는 메타포의 활용은 버나드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On Loving God)에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실체의 구분이다. 버나드와 틸리히에게 있어서 물과 포도주로 표현되는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은 형식의 차원에서의 연합이지 실체적 차원에서의 연합이 아니다. 이 비실체적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요소이다. 틸리히가 진술하듯이, 사랑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differentiation)을 전제한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성취를 상상할 때조차 이 구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버나드 맥긴은 버나드의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버나드가 말하는 연합은 “의지의 사랑에 찬 연합”(loving union of wills)이지 “동일성의 연합 혹은 하나님과의 비차별성”(union of identity or indistinction with God)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이라는 접착제에 의해서 서로 안에 거하게 될 때 한 영(one 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분리와 재연합의 변증법을 기초로 하는 사랑이라는 요소는 신비가의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과의 닮음을 향하여 더욱 가까이 가도록 만들지만 하나님과의 완전한, 실체적 연합을 주장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독교 신비주의는 언제나 사랑의 신비주의이다.

3. 신비주의의 파편적이고 기대적인 성격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세 번째 초점은 틸리히가 『조직신학』 제 4부 성령론적 맥락에서 스스로 던지는 질문과 관계된다. 기독교 전통 속의 “완덕”(perfection)과 “성인됨”(sainthood)의 이미지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의 초월, 곧 범주로서의 신비주의가 실제적인 가능성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하여 그는 “존재의 신성한 근원과의 모든 만남에서 [신비주의]는 실제적인 가능성이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estrangement)라는 한계 안에서 그러하며 신비주의는 파편적이고(fragmentary) 기대적이며(anticipatory), 종교의 모호성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다.”는 답을 내 놓는다.
틸리히에 따르면, 삶 혹은 생명(life)은 잠재적 존재(potential being)의 현실화로써 자기-동일성(self-identity)과 자기-변화(self-alteration)라는 두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데 이 두 원리의 통일이 실존적인 소외에 의해 위협받으면서 붕괴될 때 모호성(ambiguity)이 발생한다. “삶은 본질적이지도 실존적이지도 않다. 모호할 뿐이다.” 삶의 모호성은 도덕, 문화, 그리고 종교의 영역에서 드러나는데 이 세 차원의 모호성은 성령의 현존(the Spiritual Presence)에 의해 극복된다. 이 극복을 설명하기 위하여 틸리히가 취하는 용어가 “탈아”(ecstasy)이다. 이전 장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탈아는 틸리히의 신비적 체험이 반영된 용어로써 존재의 본질적 요소와 실존적 요소가 통일을 이루는 상태, 곧 초월적인 연합(transcendental union)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이 초월적 연합은 그 자체로는 모호하지 않지만 현실 세계 속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하여 파편적이고 기대적이다. “파편적”이라는 말은 그가 초월적 연합의 이상주의적(idealistic) 어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초월적 연합은 완전한 연합이 아니라 불완전한 연합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연합 역시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의해서 한계 지워지기 때문이다. “기대적”이라는 말은 초월적 연합의 종말론적 성격을 지시하는데, 틸리히에 따르면, 신비주의에서 표현되는 초월적 연합은 완전하게 소유/전유될 수 없는바 비유적으로(figuratively) 붙잡을 뿐이다. “삶(생명)은 자기를 넘어 수직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다. 그러나 어떤 차원에서도 그것이 향하는바, 무한정자(the Unconditional)에 다다를 수 없다. 다다르지는 못하지만 이에 대한 탐색(quest)은 남아 있다.”
신비주의의 파편적이고 기대적인 성격에 대한 틸리히의 진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틸리히가 신비주의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연해 보자. 그에 따르면 창조된 존재는 유한하다.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고통, 질병, 자연/타자와의 관계의 상실, 고독, 불안전, 그리고 의심과 같은 비존재(nonbeing)의 위협에 맞닥뜨릴 때 발생하는 불안(anxiety)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의 표지이다. 그런데, 비존재는 존재론적이어서 존재의 삶 안에서 완전히 제어/제거될 수 없다. 심지어 신비적 경험 안에서 조차 그러하다. 비존재의 위협은 “존재에의 용기”에 의하여 인정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틸리히식 신비가는 존재-자체(being-itself)의 힘에 참여함으로써 비존재의 위협을 무시/우회/회피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인정하고 직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비존재의 위협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그녀는 불안을 극복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전 장에서 시도한 틸리히의 존재의 신비주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상기해 보자. 전장의 숲속에서 니체를 읽으면서 틸리히가 경험했던 바, “존재-자체의 힘과의 만남“은 비존재의 위협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상태, 곧 ”절대적 믿음”을 유발하였고 그는 이 절대적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the God above God)이라고 불렀다.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은 신비주의적 열망의 대상인데 이는 객관화되거나 전유될 수 없는 존재-자체이므로 계시의 순간에도 그 신비적(mysterious) 성격을 상실하지 않는다. 주체-객체 구조의 온전한 사라짐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온전하게 성취될 수 없다. “오로지 영원한 완성(eternal fulfillment) 안에서만 주체(그리고 결과적으로 객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역사적 인간은 주체가 주체가 아니고 객체가 객체가 아니게 되는 궁극적 완성을 파편적인 방식으로 기대할 뿐이다.”(강조는 필자의 것)
결론적으로 보자면, 틸리히가 제시하는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삶은 “경계선상에서의 삶”(living on the boundary)이다. 무한한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채 실존적 위협과 대면하는 신비가의 삶은 항상 긴장과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그녀는 무한한 존재를 향한 신비적 갈망을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가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삼아 삶의 다차원적 모호성을 점증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틸리히가 『조직신학』 제 4부에서 제시하는 성화의 네 가지 원리는 틸리히식 신비가의 삶을 관통한다. 1) 신비가는 자신의 모호하고 마성적인 현실을 점점 더 인식해 가는 동시에 삶을 긍정하는 힘과 그 힘의 생기 넘치는 운동 역시 점증적으로 인식한다. 2) 신비가는 특정한 강박들(compulsions)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져서 주어진 상황을 성령의 현존의 관점에서 식별하여 이에 적합한 결정을 내린다. 3) 신비가의 삶 안에서 두 가지 관계, 곧 자기와의 관계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화해(reconciliation)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되어 그/그녀는 자기를 경멸하는 대신 자기를 받아들이고 타자와의 관계에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다. 4) 궁극적인 것을 향한 자기초월이 신비가의 삶 속에서 점증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이라고 간주되는 활동에서만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 창조적인 작업, 노동 혹은 휴식, 개인적인 상담, 혹은 교회의 다양한 활동 안에서 가능하다.

IV.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해의 개괄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신비적 체험과 그의 신비주의 이론의 삼중적 초점을 고찰하였다. 틸리히가 맺은 자연과의 관계는 신비적 참여로 규정되는데 특히 그의 발트 해에서의 신비적 경험은 유한자와의 경계선상에서 현존하는 무한자의 힘에 대한 경험이자 존재의 근원이요 심연의 경험으로써 실존적인 위협을 대면하여 살아가는 삶을 견인하였다. 상드로 보티첼리의 그림에 대한 관상은 그를 계시적 탈아로 이끌었는데 이는 언더힐(Underhill)의 탈아 이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바 실재의 심층적인 차원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었다. 니체를 읽는 중 경험한 존재의 신비주의는 존재-자체의 힘과의 조우였는데 이는 유신론적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에 대한 틸리히의 신비 신학적 이해의 기초를 이루었다.
틸리히에게 신비성은 종교와 종교 경험의 필수적 범주이다. 주체-객체 구조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은 종교적 경험의 특질(quality)로써 모든 종교의 필수적 요소이다. 신비적 유형의 종교는 거룩함을 담지하는 구체적인 매개체(형식)를 부정하면서 심연을 관통하려고 하는데 이는 존재의 해체와 소멸 그리고 무의미를 창출하는 가능성 곧 마성적 탈아의 가능성을 내재한다. 그러므로 신비적 유형의 종교는 윤리성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 “세례받은 신비주의”는 신비성과 윤리성의 통일을 가리키는 틸리히의 고유 용어로써 오리겐-버나드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드러나는바 신성의 체현된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의 신비적 연합 안에서 이 연합을 경험하는 신비가의 자기는 무한자의 심연 속에서 소멸되는 대신 무한자와의 의지의 연합을 통하여 개별적 주체성을 성취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소외된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실존의 조건 아래에 있기에 세례받은 신비주의 역시 항상적인 실존의 위협을 부정하지 않는다. 세례받은 신비가는 무한한 존재의 힘에 사로잡힌 채 실존적 위협과 대면하는 가운데 무한한 존재를 향한 신비적 갈망을 바탕으로 삶의 다차원적 모호성을 점증적으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이제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의 의의를 약술해 보자. 첫째,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은 학문적 분과로서의 현대 영성학에 대한 개신교 내 수용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1990년대 이후로 개신교 안에서 확산되고 있는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는 별개로 영성, 신비주의, 그리고 관상과 같은 영성학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들과 그 함의가 개신교 내에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기독교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체험과 이에 대한 표현으로써의 삶의 방식이라고 이해한다면 영성의 핵심에 자리하는 하나님 체험은 신비주의 혹은 신비성을 포함하게 되는바 틸리히의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적 긍정은 개신교 안에서의 영성학에 대한 수용과 발전에 있어서 충분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은 개신교 영성의 신학적 모델을 구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이론적 원리로써 틸리히가 제시한 세례받은 신비주의에 관한 언술 속에 등장하는 개념들, 이를 테면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기초한 유신론적 하나님을 초월하는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실재의 심층과의 조우로서의 “계시적 탈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의 “신비적 참여,” “사랑의 신비주의,” 그리고 “경계선상의 삶”등은 개신교식 영성의 구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학적 언어들이다. 이러한 언어들을 바탕으로 기독교인의 신앙적 삶을 기술함으로써 개신교적인 영성 신학의 일면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구성된 영성 신학은 영성학의 실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기도, 피정, 그리고 영적 지도의 신학적 원리로써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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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hill, Evelyn. Mysticism: A Study in the Nature and Development of Man’s Spiritual Consciousness. New York: The Noonday Press, 1955.

Abstract

A Brief Study of Paul Tillich’s Theory of Mysticism
Baek, Sanghoon
(Hanil University & Theological Seminary)

This essay is a constructive study of Paul Tillich’s Theory of Mysticism and considers its possibility of providing a theological ground for the reception within Protestant churches of spirituality as an academic discipline and the construction of a model of Protestant spirituality. In the first place, we will elaborate on Tillich’s life experiences of the mystical, which occurred in the contemplations of the Baltic Sea and Sandro Botticelli’s painting and the ecstatic reading of Nietzsche’s proses. Reflection of these experiences provided him, I argue, a fundamental framework in which he understood and evaluated mysticism.
What follows is the construction of the threefold focus in reviewing Tillich’s understanding of mysticism. First, there is in the later Tillich the distinction between mysticism as a category and mysticism as a type of religion. The mystical type of religion, in which the mystical predominates over the ethical, need the corrective of the ethical in order not to fall on the traps of its demonization. Second, Tillich’s unique term for the dialectical union of the mystical and the ethical, “baptized mysticism” finds its primary example in the Origen-Bernardian mysticism of love, which addresses the mystical participation in the being of Jesus the Christ as the concrete embodiment of the divine. Third, the Tillichian baptized mystic, being grasped by the power of being-itself, confronts the threats of nonbeing and lives a life of being increasingly aware of the ambiguities of life on the basis of the mystical desire of the Unconditional.

Key Words: mysticism, spirituality, Tillich, love mysticism, ecs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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