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박관희
날짜
11/03/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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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제 목
 아빌라의 데레사( Teresa de Avila, 1515~1582)에 대하여 더 알고 싶습니다.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버나드, 보나벤투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십자가의 요한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꼽히는 성인이 아빌라의 데레사( Teresa de Avila, 1515~1582)였습니다. 가르멜 수도원 개혁가, 신비가, 교회학자로 알려진 데레사는 수도적 관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조화와 일치라는 그만의 독특한 영성 사상을 보여주었고 맨발의 가르멜회(discalceati) 창립 등에서 볼 수 있듯 개혁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행동파이자 열정가로서 현실성을 잃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기도 체험과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완벽한 묘사로 학계뿐 아니라 교도권으로부터 기도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껏 기도 생활의 귀감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9남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데레사는 할아버지 때 유다교에서 개종한, 열심한 카톨릭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순교자전 읽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7살 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읽고 감동, 자신도 순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가출을 감행할 만큼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딸을 염려한 아버지는 테레사가 14살이 되던 때에 그녀를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원에서 6년 동안 위탁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테레사는 그곳에서 차차 마음이 진정되어 가다가 그만 병에 걸려 친가에 요영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테레사는 집에 돌아와 성인들의 서간을 읽으면서 요양을 하는 동안 마침내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살이 되던 해 1535년 11월 2일 아빌라의 강생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수녀가 되고나서 테레사에게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은 무척 고된 일이라 아무도 나서서 하기를 주저하였으나, 테레사는 잘 참고 인내하며 환자들을 친절히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즐거워진 테레사는 오히려 자신도 병에 걸려봤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소원대로 1538년 테레사는 말라리아를 앓아 잠시 동안 수녀원을 떠나 요양해야 했습니다. 병중에 그녀는 <신앙입문서>(Abecedario espiritual)를 읽으면서 숭고한 종교적 황홀감을 반복 경험하였습니다.

병에 걸린 지 8개월 만에 겨우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왔을 때 테레사는 은둔자들의 수녀원이 크게 확장되어 봉쇄법은 조금도 엄격한 데가 없었으며, 평신도들이 너무 많이 드나들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세속적인 관계가 수도자의 내적 수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혼자 떨어져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기도와 교부들의 저서를 읽는데 전념했습니다.

테레사는 1560년 초창기의 엄격한 수도 생활의 규율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그녀가 속한 카르멜 수녀회의 개혁을 단행하여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을 세울 계획을 하였습니다. 1562년 2월 7일 로마 교황청에 새로운 수도원 창립을 위한 청원을 하였습니다. 같은 해 8월 24일 테레사는 개혁 카르멜의 첫 수도원인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을 설립하고 13명의 수녀들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갔습니다. 또한 1567년 11월 28일에는 십자가의 요한과 함께 두루엘로에 남자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였습니다. 이렇게 테레사는 총 15개의 남자 수도원과 17개의 여자 수도원을 창립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녀의 계획에 반대했던 카르멜회 총장은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테레사와 그 동료들을 과격파라고 비난하며 공격하였으나, 결국 그녀의 생각에 동조하여 승인해 주었습니다. 테레사는 에스파냐 전역으로 카르멜회의 쇄신과 개혁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소모하여 고군분투하였으나 시련이 많았습니다. 1575년 총회는 그녀의 개혁 그룹을 제한하였으며, 1580년까지는 카르멜회 내부에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테레사의 개혁은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맨발의 카르멜회가 정식 승인을 받음으로써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테레사의 수도원 개혁 작업은 각처의 다른 수도원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녀는 수도원 창설 내지 개혁을 위한 의논 상대로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테레사는 1582년 9월 2일 알바 테 토르메스로 여행을 하던 도중 돌연히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4일 밤중에 임종의 때가 가까웠음을 안 테레사는 하느님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주여, 저는 성스러운 교회의 딸입니다” 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세계로 몰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아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의 여정을 묵상의 기도, 고요의 기도, 합일의 기도로 묘사했으며 이러한 가르침 등을 통해 사람들이 물질생활의 풍요로 인해 퇴폐와 타락에 빠져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을 막아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페인 가톨릭 정신의 발로로 생겨난 신비주의 문학의 거성이라는 명칭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신앙심과 도덕적 윤리관을 불어 넣는데 힘썼던 그의 노력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테레사는 많은 편지와 글을 썼습니다.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영혼의 성>은 그의 대표작이면서 또한 세계 종교 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고백록>처럼 자신의 영혼 상태를 이야기 하며,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을 설명한 <천주 자비의 글> 등의 작품이 있으며 400여통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과 후렴구를 지닌 민요적 성가 형식의 시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장 역시 정감 어린 필치와 명쾌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그녀는 글을 쓴 여인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 존중되고 있는 그의 글은 초자연적 체험들에 대한 설명과 열매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세밀하면서도 단순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것들을 단순한 대화문 형태로 설명해 주었고 또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신비가들이 가르친 내용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명백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기도의 실천적인 가르침에서 예수의 데레사는 자주 기도의 단계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기도의 단계란 곧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능한 성숙의 단층들을 말하는 것은 물론이며, 기도자의 입장에서 기도 자체를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데레사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기도의 깊이는 기도자의 삶에 의해 조절됩니다. 물론 그 반대로 기도에 의해 기도자의 삶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기도자는 물론이며 기도와 행동은 늘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품행 역시 상호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웃 형제들과 교회, 그리고 인간성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기도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기도에 대한 데레사의 기본적인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도란 단순한 수련의 실천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것(trato de amistad)입니다(자서전: 한국에서는 <천주 자비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우정은 하나님과 인간이 친구가 되어 서로 우정을 나누는 “상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알고 있는 그분과 나누는 우정이라고 하면서 신비적으로(misteriosamente) 표현하고 있지만 몇 가지를 항상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상호 관계에서 인간의 입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새롭게 하느님의 행위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기에서 입장이란 하느님의 행위와 현존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된 기도란 실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우정과 삶은 성숙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도와 삶이 퇴보하거나 고착된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

셋째, 바로 여기에서 “기도의 단계”가 마치 우정의 정도와 삶의 수준처럼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특별한 개념과 더불어 양극화된 관계로 기도가 이해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수덕적(ascetica) 행위와 신비적(mistica) 행위로 이해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테레사는 항상 기도하는 인간에 의존해서(수덕적 기도)는 물론이요 동시에 거룩한 친구(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시작하시는 것에서 파생되는 기도의 최고 높은 단계들로 기도의 단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테레사와 같은 신비신학자들의 작품에서는 두 번째 요소들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예수의 테레사가 이야기하는 기도의 단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입니다.

테레사가 말하는 기도의 단계들은 여러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서 네 작품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작품은 <자서전> 11-21장에서 1565년경에 있었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기도의 단계이다. 둘째 작품은 <완덕의 길>은 22장 이하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1566-1567년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서 교육적인 방법론을 곁들여서 자기 수도회의 수녀들에게 가르치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셋째 작품은 영적 지도를 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지침>(Relaciones), 혹은 <양심 성찰에 대한 이야기>(Cuentas de conciencia)라 불리는 것(157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서 세빌랴의 종교재판소의 신학 재판관의 요청에 의해 서술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넷째 작품은 <영혼의 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체적인 영성생활을 정리하는 작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1577년에 저술된 것입니다.

그녀의 <자서전>은 예수의 테레사가 자신의 기도생활에서 얻어진 체험을 신학적으로 확인해보기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신학적 자문을 해주었던 신학자들의 판단에 맡겨보기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신학자들이 자신의 신비체험에 대한 식별을 해주기 바랬던 것입니다. 테레사는 매우 지혜롭게도 이러한 내용(23장 이하의 내용)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시 흐름을 깨고, 기도의 네 단계에 대해 삽입합니다.

기도의 네 단계들은 주님께서 전적인 호의로 자신의 영혼에게 여러 번 새겨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발상에 비추어볼 때 기도에 대한 짧은 설명은 신비체험적 단계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신비체험의 단계들을 분별하게 하고, 이어지는 체험에 대한 설명에 가치를 부여해주기를 바라는 그녀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데레사는 정원과 정원을 가꾸기 위해 물을 대는 방법의 비유를 끌어들입니다.

테레사는 기도를 정원에 물주는 일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정원은 영혼을 말하며, 정원의 주인은 주님을 뜻하고, 물을 주는 것은 기도를 뜻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을 줄 수 있듯이 기도의 방법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정원은 우리의 마음 곧 심령의 밭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정원의 잡초를 제거해 주셨으며, 기도는 꽃이 피도록 정원에 물을 주는 일입니다. 테레사는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을 두레박으로 물주기, 물레를 이용하여 물주기, 시냇물을 이용하여 물주기, 빗물(소나기)로 물주기 등의 4가지 종류로 나뉘어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기도의 단계는 정원에 두레박으로 물주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의 기도는 기도의 초기 단계를 말하며, 여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즉 디 기도하기 가 힘이 듭니다. 정원은 흡족하지 못하며, 메마르고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여야 합니다. 이 단계는 자서전 11-13장에서 서술되는 수덕적 기도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주님의 말씀이나 혹은 주님의 신비스러운 생애에 대한 단순한 묵상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묵상기도에서 큰일을 이루어보겠다고 떨치고 일어나는 것, 즉 높이 오르기 위해 홰를 크게 치면서 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하면서 묵상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 첫 단계에서는 사랑스럽고 침묵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견디신 고통, 그 고통을 참으신 이유, 고통 받는 분이 어떤 분이며, 어떤 사랑으로써 괴로워하시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벗이 되어 있음을 바라보는 것”(자서전, 13,22)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두 번째 기도의 단계는 물레를 이용하여 물주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의 기도는 기도의 진미를 알기 시작하며, 고요한 명상의 기도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신령한 일들(성서의 진리)에 대한 영혼의 회상 활동이 가능하여집니다. 모든 일들이 위로의 이유가 되고 영혼은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이 단계는 자서전 14-15장에서 서술되는 것으로서 고요의 기도(oracion de quietud), 혹은 신비적 기도(oracion mistica)라고 불리며, 돌발적으로 황홀함에 끌려들어가는 순간을 말합니다. 이 순간을 표현하는 용어인 “고요의 기도”라는 말은 “주님께서 영혼 안에 불붙이시는 참사랑의 작은 불꽃”(자서전, 15,4)을 말하는 데 아마도 예수의 데레사만 사용했던 표현일 것입니다. 이 단계는 거룩한 신비(misterio divino)로 말미암아 놀란(황홀해진) 의지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수동적인 쉼(홀로 있고 싶어짐)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분의 포로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좀더 맛깔스럽고 푸짐히 즐기기 위해 감관의 온갖 능력을 자기 안으로 집중시키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당신을 주시며 그와 사귀기 시작하시고 영혼은 이런 사귐을 느끼도록 더욱더 간절히 바라면서, 이 상태에 이르기 시작하자마자 영혼은 세상의 사물에 대해 희망을 잃기 시작합니다.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황홀함은 거룩한 친구이신 주님과 새로운 형태의 사귐을 시작하도록 만듭니다.

세 번째 기도의 단계는 시냇물로 물주기 방법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깊은 원리, 즉 영적 기도의 원리를 터득합니다. 이것은 기도의 수동적 형태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 영혼이 관상의 경지, 즉 하나님께의 전적인 몰입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정원의 꽃이 활짝 피고 향내를 발하게 됩니다. 명상은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이 단계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면서 오관의 능력들은 잠이 들고, 힘찬 기도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순간을 말합니다. 이 때에 영혼은 은총의 물에 너무 흠뻑 젖어 있어서 어떻게 된 셈인지도 모르는 채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면서 다만 주님의 위대함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기에서 “영광스러운 광기(예상을 벗어남)”, “천상적인 어리석음”, 의지의 “몽롱함”(술취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영혼은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게 되고 엄청난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네 번째 기도의 단계는 소박비로 물주기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나 대신에 직접 정원에 물을 주십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황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연합)은 불과 같으며, 이때 영혼은 세상의 쾌락을 경멸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경험은 소나기처럼 예기치 않은 못하게 오며, 오래 지속되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도 합니다. 마음의 부드러움이 일어나며, 위대한 결단도 생기게 됩니다.

이 단계는 거룩한 일치(divina union)의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 정신의 모든 행위들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고,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분과 일치하는 영적 상승(vuelo de esp&iacute;ritu: 탈혼)의 상황과 환시체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영혼이 경험하는 일은 분명치 않아서 뚜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는 것을 본다는 것과 이 은총의 확실성이 영혼 안에 사랑의 상처가 되어 너무나도 깊게 남기 때문에 영혼이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을 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녀의 <완덕의 길>은 데레사 성녀가 자기 수녀원의 수련자, 혹은 최근에 수도서원을 했던 수녀들, 그리고 관상적 삶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양성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를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서 “구송기도”(oraci&oacute;n vocal), 정신적 기도(oracion mental), 그리고 관상(contamplacion), 이렇게 세 가지 단계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순서에 있어서 반드시 종속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아니며, 관상기도의 순간에서도 구송기도의 필요성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그녀는 정신적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구송기도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구송기도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착상에서 중요한 신비적 기도는 두 번째 단계인 정신적 기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에서 설명하는 기도의 단계가 때로는 <자서전>에서 설명하는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첫째 단계는 <완덕의 길> 22장에서 설명하는 구송기도(성무일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포함)의 단계인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익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될 수 있으면 묵상기도와 구송기도를 하나로 묶어서 다루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헷갈리지 않기를 바라서입니다.”라고 합니다. 구송기도, 아니 기도의 초기 순간에서 중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과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지극한 공경을 다하여야 되느니 만큼, 예절을 갖추어서 대화하려면 먼저 누구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아는 것이 상책”이라고 합니다.

둘째 단계는 정신적인 기도(묵상기도)에 흥미를 갖게 되는 순간으로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인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터득하면서 주님 앞에 침묵으로 머물면서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특히 묵상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누구와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렇듯 크신 주님과 감히 말을 주고받느냐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고 합니다.

셋째 단계는 “거둠의 기도”(oracion de recogimiento), 즉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단계를 말합니다. 거둠이라 일컬음은 영혼이 제 모든 능력(감관)을 거두어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같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성을 가지고 숱한 추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거창하고 아리송한 명상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으라는 것뿐이다.” 외계의 사물에서 감관을 거두어들이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겨지게 되는데 눈을 감으면 영혼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여러 가지 탁월한 습관이 생긴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단계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이끌어 가실 주님께서 주부적 관상의 단계에 놓아주시도록 맡기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넷째 단계는 신비적 기도의 초기 단계를 단순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관상기도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이에게만 허락하는 은총이라서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고 강조한다(완덕의 길, 17,7). 다시 말해서 성인이 되는 것은 반드시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르타의 예를 든다(완덕의 길, 17,5). 이런 은총과 영광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지라도 언젠가는 그분께서 생명의 물을 주실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테레사는 세빌랴에서 종교재판관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깔멜 수도공동체에 아무런 영향은 없었지만 그녀가 수도회를 시작했던 까스틸랴 지방에서는 <자서전>이라는 책을 몰수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재판소의 재판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줄 것을 데레사 그녀에게 요청합니다. 그 질문들 가운데 어떤 것은 매우 불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오면서 실천했던 기도를 설명하는 데는 오히려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을 했던 신학자에게는 관상기도가 별로 흥미가 없었다는 야유를 보내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흥미 있어 하는 기도의 신비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매우 자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도의 단계라고 하기보다는 기도의 단계에 따라 주어진 신비체험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독교 신비가이면서 동시에 당시 교회 개혁에 관여했던 행동가였습니다. 테레사는 단순히 현실 도피적이고 탈역사적인 주관적 신비주의적 현상에 탐닉하는 삶을 뛰어넘어 진지하게 내면의 요청을 용기있게 받아들인 활동가였습니다. 그 중에서 그녀의 내적성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저서가 <영혼의 성>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과의 영적 여정을 상징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묘사해 놓은 테레사 자신의 체험적 이야기입니다. 테레사는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영적여정에로 초대를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성>은 영혼이 참된 인간이 되어 거룩한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부터 은총의 충만함을 체험하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신의 방식대로 설명하는 탁월한 작품입니다. 모두 일곱 개의 여정으로 이루어졌지만 각각의 여정이 고유한 기도의 단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여정(1-3궁방)은 수덕적 기도의 단계를 설명하고, 마지막 세 개의 여정(5-7궁방)은 순수하게 신비적 기도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네 번째 여정(4궁방)은 수덕적 기도와 신비적 기도의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테레사는 이 책에서 영성생활의 수준과 기도의 단계를 철저하게 동반적인 관계로 설명합니다. 테레사에 의해 설정된 이 기도의 점진적 단계는 사실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타당하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 자신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개해 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을 살펴보시는 분은 영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영이 하나님께 맞갖게 성도들을 위해 중개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영적 순례자들은 성 중앙에 위치한 수정으로 된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방들을 거쳐야 합니다. 방들은 일곱 개의 동심원으로 배열되어 중앙을 감싸고 있습니다. 최종의 마지막 제 7 궁방이 그 성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중앙은 흡인력이 있어 궁방들을 통과하는 여행자들을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성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과의 합일에 가까워집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테레사는 생생한 영적 성장과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인간의 내면을 매우 예민하게 관찰하고 경험한던 사람이었습니다. 테레사는 심리학적 통찰력을 지닌 신비가입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자기내면으로의 하강은 곧 하나님으로의 상승과 역설적인 일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영혼의 성>의 서두에서 우리 영혼을 마치 금강석이나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궁성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방들이 있습니다. 보다 자세히 영혼의 성의 전체적인 구조를 펼쳐보면 이렇습니다. 수정으로 된 아름다운 궁성 안에는 일곱 궁성들이 있습니다. 그 성 전체의 모양은 사방이 방으로 둘러 쌓여있는 구체(球體)입니다. 모든 방은 위아래, 좌우, 전후의 방들로 둘러 쌓여져 있습니다.

그 가장 깊은 방은 제7궁방의 가장 깊은 궁실인데 그 곳에 영광의 임금이 좌정하여 계십니다. 그 밀실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영혼 안에도 하나님 혼자 계시는 궁실 즉 또 하나 다른 하늘이 있다고 테레사는 말합니다. 그 궁실로부터 화려한 영광의 빛이 밖을 향하여 계속해서 비추어집니다. 어두움과 갖가지 해로운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궁성 밖에 있는 영혼은 그 빛을 따라서 중심에 이를수록 더 많은 빛을 받게 되고 그 벌레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됩니다. 테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의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7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 1 궁방에서 의인의 영혼은 천국 그 자체와 같습니다. 이 방에서의 기도의 단계는 아주 기초적인 기도의 수준입니다. 기도자가 외적인 것에 젖어있다거나 내적인 무질서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도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마치 귀머거리이며 벙어리가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같을 것이며, 중풍병에 걸린 환자와 같은 것입니다. 영혼이 죄를 지을 때 영혼은 차갑고 두려운 어둠으로 변하고 악마가 그 안에서 활동 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아름다움과 위엄은 전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선악이 함께 있어 싸웁니다.

제 2 궁방에서 영혼은 기도를 실행합니다. 이 단계는 본격적으로 묵상적인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예민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기 시작합니다.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인 이가 듣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회와 신앙의 정진을 행하고 하나님 은혜를 맛보고 깨닫게 됩니다. 영혼이 주님계신 방에 접근할수록 주님이 나에게 참 좋은 이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 3 궁방에 들어온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축복된 사람입니다. 이 단계는 묵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영성생활에 있어서 안정감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 아니하고, 소죄마저 피하며, 즐겨 고행을 하는가 하면,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는(내적 침묵에 이르는) 일과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남을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세상적인 관심사들을 끊는 초연의 노력과 시험과 고통들을 이겨내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실수와 과오를 딛고도 낙망치 않고 기도에 더욱 정진해야 합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앙적 확신과 고백은 심리학적인 성장과 더불어 일어난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하는 하나님 인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아인식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영적여정의 시작부터 마지막 완성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릇 자아인식이란 주께서 당신이 계시는 궁실 안으로 끌어 들인 영혼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며, 아무리 높이 오른 영혼일지라도 자아 인식을 잊어버리고 그 일을 멈추는 날에는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결코 자아인식에 이르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절대시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아인식을 익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자아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테레사가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내면의 성문들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방법은 기도와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기도와 별개의 또 다른 수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없고, 구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기도를 경계하면서 깊은 성찰이 있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기도형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합니다. 구태여 그녀는 구송기도보다 묵상기도를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라도,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자아인식의 단계로서의 <영혼의 성> 제 1 궁방에서 제 3 궁방까지는 테레사는 자아 인식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속에 찌들고 공명과 야욕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영혼의 모든 기능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뜻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여정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면의 세계는 바깥 세계와의 긴장이 고조됩니다. 이 때 영혼은 그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힘쓰게 되며 실질적으로 모범적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이끌어갑니다. 이러한 영적생활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자아 의식은 보다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고, 이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자신의 페르조나의 일부가 됩니다. 테레사는 이러한 진행상황을 매우 바람직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영혼의 메마름을 언급하면서 제 3 궁방의 사람들에게 강화된 페르조나가 그대로 굳어져버릴 것을 염려하면서 ‘기도생활에서 흔히 대단한 권태기가 오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완전한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럴 때마다 더욱 자기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제 4 궁방에서 영혼은 주님이 계신 곳에 아주 가까이 접근합니다. 이 단계는 묵상이 매우 안정되고 단순화되기 시작하는 때이며, 가끔 의지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고요함이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한결 가까워지기 때문에 가끔 주시는 아름다운 은혜를 설명할 도리가 없으며, 항상 일정하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당신이 주고 싶으신 때에, 주고 싶으신 대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십니다. 이 때에 사랑이 눈을 뜨게 되는 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큰 도움이 요구됩니다. 영혼은 기도의 깊은 희열을 맛봅니다.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련도 크므로 잘 이겨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는 고요의 기도를 행하며 깊은 명상(지적 활동)을 통해 영적 횐희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하나님 자신의 활동으로 평화와 고요와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샘물처럼 흘러나옵니다.

<영혼의 성>에서의 진정한 영적 진보의 출발은 전반부 자아인식을 끝내고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제 4 궁방에서부터 입니다. 제 4 궁방은 제 1-3 궁방까지의 능동적 영적여정으로부터 제 5-7 궁방까지의 수동적 영적여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환기적 단계입니다. 테레사는 여기서부터 초자연적 사실들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 동안 자신의 영적 여정에 발목을 잡고 적지 않게 괴롭히고 장애물이 되어왔던 바깥에 있는 사물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성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경험을 합니다. 내면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단계입니다. 어지신 목자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들릴락 말락한 휘파람 소리이지만 우리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집으로 돌아오라, 이제 더 가엾이 헤매지 말라는 목소리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바깥 피조물 세계에서 찾았던 하나님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더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서 점점 영적성숙에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테레사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려 하지 말고 주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것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전에 주로 사용했던 기도와는 달리 이성적인 작용을 덜 사용하는 거둠의 기도를 권장합니다. 아니 이것은 능동적으로 그러한 기도를 해야 한다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도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둠이라고 하는 의미는 영혼의 모든 능력들을 거두어 들여 자신 안으로 들어가 초자연적인 맛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제부터 괴롭게 여겨졌던 기도가 자연스러워지며 영혼은 점점 침잠해지며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되지 않았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접촉이 시작됩니다. 초자연적인 체험에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테레사는 제 4 궁방에서 가냘프지만 휘파람 소리와 같은 내면의 소리 즉 무의식의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 방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혼재하는 상태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제 5 궁방에서 영혼은 하나님과 기도에서 연합합니다. 됩니다. 이 단계는 소위 일치의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와 현존이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단한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오직 사랑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불타오른다고 말합니다. 누에와 그 나방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일치란 우리의 뜻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사랑은 결코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영혼 속에 주십니다. 이 방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여기서 영혼은 고치(즉 옛 자아)에서 나와 나비가 되어 새 세상을 날게 됩니다(이것은 새로운 자아) 곧 영적 자아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때 영혼은 세상의 죄를 속량키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나눕니다. 합일의 기도의 다른 형태는 하나님의 뜻과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제 7 궁방에 이르기 전까지 하나님과의 합일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은 고치 시절에 겪었던 혹독한 어두움을 다시 지나야 합니다.

테레사는 제 5 궁방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에-고치-나비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에는 처음 제 3 궁방에서 튼튼히 성장합니다. 영적 순례 여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충분히 자란 누에는 고치를 틀기 시작합니다. 그 캄캄한 내부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기 위함입니다. 누에가 되어 죽기를 거듭거듭 촉구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미천한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비가들의 신비적 일치의 현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일치를 말하는데, 우리 자신이 완전히 비워지지 않는 한, 그 사랑의 일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동안 키워 온 자아는 죽고 이제 마침내 변모된 나비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비로의 변모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합일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 깊은 터널에서 이전의 의식이 죽으면 새로운 의식이 태어나게 됩니다. 테레사는 이것을 나비라고 표현하며, 그러나 나비가 되어 새롭게 변모된 영혼일지라도 하나님의 높디높은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 나비는 저 높은 은혜의 바다인 창공을 향하여 마음껏 날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이 있으나, 그 날개가 매우 미약하기에 열망대로 치솟아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누에의 상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도대체 어디로 올라가야 할지를 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 5 궁방에서 시작된 고치 상태의 어두운 밤이 지속됩니다. 이것은 불안정한 나비의 상태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정화의 단계입니다. 이 상태를 십자가의 요한의 이론에 의하면 감각의 밤과 영혼의 밤이라고 합니다. 감각의 밤은 피조물과 밖의 세상에 대해 아무런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메마름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영혼의 밤은 더 한층 강렬한 칠흑과 같은 밤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밤을 일컬어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진다고 말합니다.

제 6 궁방은 영혼의 하나님과의 연인 또는 영적 약혼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상사병) 영혼이 탈혼 상태에서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현시가 보이는 순간이기 때문에 모든 방면에서 신비적 은총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영혼은 오직 사랑만 하고 싶고, 다른 아무것도 모르고 싶어집니다.

테레사는 제 6 궁방의 상태를 영적 약혼으로 비유하면서 합일을 말하지만 그것은 항구적이 아닌 서로 떨어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곧잘 그 영혼이 신랑을 의식함이 없이 자주 홀로 남아있게 됩니다. 여기서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의 지속적 관계에 들어가려 하며 완전한 합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큰 시려도 이겨내야 합니다.

영혼은 이 기도의 단계에서 때대로 황홀의 극치, 영의 날아오름, 말씀, 현시 등의 비상한 신비 현상들을 체험합니다. 실제로 제 4 궁방에서 시작된 밤은 제 6 궁방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감각이나 지성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영혼이 풀무 불에 담금질되어 깊은 자아인식에 이르게 합니다. 항상 우리의 빈곤과 비참을 보게 되며, 그러한 자아 인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중요한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이른 영혼은 하나님이 베푼 지극히 큰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과 진흙 구덩이에 뒹굴고 있는 듯한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테레사는 이러한 죄성이 너무나 깊게 느껴지기에 죽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때때로 스스로의 맛과 즐거움을 내던진 채, 당신의 아프심을 우리의 아픔으로 사는 것을 몹시 기꺼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테레사는 아무리 깊은 심연의 영적체험에서라도 기독교적인 핵심 이미지인 십자가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는 결코 포기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거듭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기진맥진한 어두움의 영적여정을 끝내고 우리 영혼은 마지막의 투쟁을 벗어나 항구적인 합일을 향하여 가장 은밀한 밀실 제 7 궁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제 7 궁방은 기도의 최고의 단계로서 영혼의 하나님과의 영적 결혼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은 신적 광명과 지적 통찰로 불 켜지고 밝아집니다. 제7궁방에서 테레사는 결혼의 유비를 사용하여 영적 여정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신부로 삼으신 영혼을, 당신이 그리워서 못 견디고 못 견뎠던 일을 어여삐 여기시어, 영성적 결혼이 끝나기 전에, 그 영혼을 밀실, 즉 제 7 궁방에로 들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저 하늘에 당신의 궁실을 가지시는 것처럼, 영혼 안에도 하나님 혼자 계시는 궁실, 즉 또 하나 다른 하늘을 가지시는 셈입니다. 주님이 내리신 은혜를 맛보는 듯 하지만 늘 답답했고, 날아다니기는 하나 쉴 자리가 없었던 나비의 이미지는 폐기되고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신랑신부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서 떨어질 수 없는 주님의 항구적인 은혜의 맛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그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과 그토록 결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됨을 말합니다.

제 7 궁방에서의 영혼은 항상 그 핵심에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결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이 단계는 충만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단계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다시 형성된 것과 같습니다. 삼위일체이신 주님께서 자신 안에 들어와 사신다는 체험을 영적 결혼이라는 말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자의 완전한 변화는 물론이며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수용할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테레사는 전자를 떨어질 수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비유하고, 후자를 나뉘어질 수 없는 하늘에서 강물이나 우물에 떨어지는 빗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궁방이 다른 궁방과 완전히 다른 점은 여기서는 마음의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이, 영혼은 거의 항상 고요 잔잔하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첫째 자기 자신을 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괴로움이라도 더 당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철저히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서 자기를 얻는다는 진리에 이르게 된다. 여기 깨달음이란 지성적 납득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체험적 상태를 말합니다. 테레사는 삼위일체의 깨달음을 향하여 영혼은 묘한 인식으로 세 위가 하나의 실체, 하나의 힘, 하나의 앎,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더 참될 수 없이 깨치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가 신앙으로 믿는 바를 여기서는 영혼이 깨쳐서 어쩌면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랑되신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가장 깊은 궁실로 이끌려 들어갈 때 마침내 자아는 신랑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 스스로 자유를 고스란히 바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 자기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비로소 영성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방해를 받기는 할지라도 일단 내면에로 귀를 기울여, 내면에서 비추어 오는 빛 혹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노라면 마침내 내면 깊이에로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테레사는 영적 여정의 수동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테레사의 영적 결혼은 한 인격이 신에게로 흡수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성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은 자기 안에 분명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화살을 쏘시고, 자기의 생명에 생명을 주시며, 영혼 내부의 모든 능력을 큰 빛으로 밝혀 주는 햇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치는 것이 곧 영적 결혼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이렇게 항구적인 듯한 결혼의 이미지에도 남은 일이 있습니다. 덕 닦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쪼그라들 수도 있다고 테레사는 경고합니다. 그래서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의미로 복음서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서 둘을 하나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테레사는 내적인 해방과 외적인 해방을 결코 모순적인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 7 궁방의 체험의 결과는 자신 자신을 온전히 잊게 되고, 하나님과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게 되며 하나님의 일(뜻)을 전적으로 행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이 은혜를 주신 목적은 마리아(관상)와 마르다(&#48379;사·행동)가 함께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테레사는 내면생활, 하나님으로부터의 조명, 수동성 등을 영적 성장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강조하면서, 스페인에서의 영적 부흥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녀의 일생과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경험들과 세상적인 신비들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의 신비 생활과 기도에 정착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길이며 목적이었습니다.

테레사는 그녀의 사후 40년 되는 15622년에 교황 그레고리 15세에 의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시스 싸비에르와 함께 시성되었으며(canonized), 1972년에 교황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추대되었습니다. 테레사의 영성 살상은 주로 관상적 기도에 의한 우리 영혼의 하나님과의 합일(연합),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사랑, 목적의 단순성, 내면적 자아의 발견, 그리고 겸손과 사라의 실천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테레사의 공헌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기도의 오묘함과 신비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서 아빌라의 테레사만큼 기도의 신비와 방법에 대해서 이처럼 분명하게 말해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테레사는 기도 신학의 대가로 불려지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기도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뜻의 강한 설교자로서가로서 교회(특히 갈렐 수도회)의 영적 갱신에도 크게 공헌한 실천적 영성가였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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