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주선영
날짜
08/05/22 15:40

Hit

2159
제 목
 이냐시오 방식에 따른 영성식별(discernment of spirits) 연습(유해룡)
 
 

이냐시오 방식에 따른 영성식별(discernment of spirits) 연습

유해룡


영성수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중의 하나는 식별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너희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엡 5:9-10)라고 성서는 식별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인식하는 자는 누구나 다양하게 열려져 있는 선택 앞에서 매순간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중하게 된다. 물론 열려져 있는 모든 선택의 가능성은 기본적인 상식이나 윤리적인 규범에 따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어느 것을 선택할지라도 윤리적인 측면으로 볼 때 대등소이하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것들 중에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 최선의 것이 있다고 믿기에 선택은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남는다. 더우기 그것이 앞으로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면 선택의 신중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과 능력에 따라 자신의 일을 맡기고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그것이다. 식별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파트너 쉽에 우리 자신이 참여하고자 하는 영적 요구로부터 비롯된다.
영성식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연습은 이미 전호([기독교 사상], 9월호)에서 다루어진대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이다. 하나님의 내면적인 임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방식에 적응할 준비를 시켜준다. 영성식별에는 이중적인 과정을 요구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우리 환경에 대한 감성적인 경험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해석하느냐의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선택적인 일에 대하여 어떻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느냐의 과정이다. 말하자면 선택에 동원되는 두 요소인 감성(affectivity)적 경험과 이성(reason)적 판단의 추구하는 것이 영성식별의 과정이다. 인간이 감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느낌이나 충동등이 하나님의 경험을 식별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반면에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나 추리적 과정 또한 하나님의 경험을 식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별개의 작용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요소이다. 만약 감성적인 경험을 억누르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이성적인 기능에만 의존한다면 행동력을 갖춘 가슴은 잃어버릴 수 있다. 반면에 이성의 소리를 무시하고 오직 느낌과 충동등의 감성적이 요소에만 의존한다면 주관적인 열정주의에 사로 잡혀 냉철한 식별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식별 과정에서 기억해 할 구호는 “당신의 머리를 사용하고 당신의 느낌들을 신뢰하라”는 말이다.
느낌과 이성이라는 쌍두마차가 온전하게 달릴 때 식별작용은 왕성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냐시오에 의하면 이 느낌을 감지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기능(영혼의 기능)이지만, 우리 자신이 그 느낌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느낌을 일으키는 대상적인 용어로서 ‘선신(good spirit)과 악신(evil spirit)’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력인 마귀의 영등이 우리 영혼 안에서 느낌을 일으키게 하는 주체들이다. 우리 영혼은 직접적으로 이 대상들을 감지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단지 느낌이나 감성의 경험을 식별함으로 그 실체를 추적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영혼이 이 감성적인 작용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의 방식과 그의 대항세력의 방식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적응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이냐시오는 ‘두 개의 깃발’이라는 묵상자료를 제시한다.

I. 두개의 깃발 묵상: 그리스도의 작전과 사탄의 작전에 대한 묵상

이 묵상기도에서 미리 구할 은총의 기도는 “악마의 계교를 미리 알고, 거기서 나를 경계하기 위하여 은혜를 구할 것이요, 지존하시고 참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다운 생활의 인식과, 그를 본받기 위하여 은총을 비는것”이다(영신수련, 139).
이냐시오는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제시한다. 즉 우리의 총지휘자이신 ‘주 그리스도의 깃발’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들의 원수인 ‘루시퍼의 깃발’이다. 이냐시오는 영성훈련자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 두 세력의 실상에 도달하도록 권한다. 상상력을 위한 다음의 길잡이를 주고 있다. “선량한 사람들의 총지휘자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진을 치고 계시는 [예루살렘] 부근 일대의 넓은 평야를 상상할 것이고, 또 하나는 원수들의 두목 루시퍼가 점령하고 있는 󰡔바벨론󰡕 부근의 벌판을 상상할 것이다”(영신수련, 138). 이냐시오가 이런 상상력의 사용 목적은 영성훈련자가 이러한 과정을 따르는 동안 훈련자 자신이 겪고 있는 영적 투쟁의 현장으로 옮겨지게 하려는 바람이다. 상상의 세계를 매개체로 하여 현실적인 영적인 투쟁의 장소로 훈련자를 인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은 결코 이냐시오 자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 역시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인간의 영적인 실존을 두개의 도시로 비유하고 있다. 즉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상’ 혹은 ‘마귀의 도성’이다. 신의 도성의 주인은 예루살렘의 왕 즉 그리스도이시고, 악마의 도성의 주인은 바벨론의 왕 즉 악마이다. 신의 도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비하로 이루어지는 곳이고, 지상의 도성은 자기 사랑, 하나님 멸시로 특징지어지는 곳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투쟁의 이미지이다.
이냐시오의 두개의 깃발의 묵상에서 훈련자는 이미 자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싸움을 깊게 인식한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사랑과 그것을 대항하려는 영혼의 싸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몸부림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감지한다. 이 때 우리는 자칫 속임을 당하기 쉽다. 즉 우리의 감정에 거짓 자신감과 만족감을 허락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의도를 왜곡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두 깃발이 내걸고 있는 가장 명백한 속성들을 밝히고 있다. “(루시퍼가) 사람들을 유혹할 때는 대개 언제나 부귀를 탐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쉽게 세상의 헛된 영광을 바라게 하며, 또 거기서 큰 오만에 떨어지게 한다”(영신수련, 142). 즉 사탄의 작전의 첫째 단계는 부귀요, 둘째 단계는 명예요, 세째 단계는 오만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우리들을 매혹시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는) 우선 온전한 영성적인 청빈으로 인도하고, 또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것을 선택하는 것을 찬성하시고 원하신다면 현실적 가난에까지 인도해서, 거거서 또 업신여김과 모욕함을 원하기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그들을 도와 주도록 분부하시는 말씀을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 청빈과 모욕에서 겸손이 생기는 까닭이다”(영신수련, 146). 즉 그리스도의 작전의 첫째 단계는 부귀와 반대되는 가난이요, 둘째 단계는 세속적 명예와 반대되는 업신여김과 모욕함이요, 세째는 오만의 반대인 겸손이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모든 덕행을 가능케 한다. 영성수련자는 이 상반된 이미지들의 내적인 명상을 통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짓을 가장한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함정들의 묘함을 인식하고 식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마태복음 4:1-11절과 마가 복음 8:31-38절을 통하여 그 상반된 실체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선택을 위한 마음가짐이 성숙해진 수련자에게 세 가지의 선택의 시기들을 제시한다.

II. 선택을 위한 길잡이

이냐시오는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 건전하고 좋은 선택을 위하여 시간을 두고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감성의 움직임을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에 그 속성에 익숙한 수련자는 세밀한 마음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기울어진 것들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적어도 상식과 윤리성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선한 것이어야 한다.

1. 첫째 타입의 선택 시기(영신수련, 175): 마치 바울의 다메석 도상에서의 부르심이나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른 것처럼(마 9:9) 그 영혼이 주님을 따르는데 조금도 의심을 가지지 않을 만큼 주님을 향한 헌신의 열정으로 달아올랐을 때라면 그 때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시기이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드나드는 것이나 영혼 전체를 지존하신 하나님의 사랑에로 끌어 당기면서, 그 안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조물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때문이다(영신수련, 330). 이 때의 선택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어떠한 혼란도 겪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가히 신비적인 영의 역사이다.

2. 두번째 타입의 선택 시기(영신수련, 176): 영혼 안에서 영성적 위안(consolation)과 영성적 고독(desolation)이 번갈아 일어나는 때이다. 하나님은 이 영혼의 움직임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의 감성적인 느낌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고 어떤 영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감성적인 경험(affective experience)을 식별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의 방식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 내면적인 경험을 식별하기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흐름이 일정하게 항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들, 저항감, 만족감, 안위감, 평화등의 감성적인 경험이 지나가 버리는가 하면 다시 교체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곤 한다. 그러한 느낌들을 ‘영성적 위안(spiritual consolation)과 영성적 고독’(spiritual desolation)이라는 기술적인 용어로 이냐시오는 표현한다. 이 분류가 명백할 때 영성식별의 작업이 진행된다.


1)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에 대한 이해


‘영성적 위안’이나 ‘영성적 고독’이란 기도 중에 경험되는 감성적인 경험을 말한다. ‘영성적 위안’이란 유쾌한 느낌이나 편안한 느낌을 말하고, ‘영성적 고독’이란 불유쾌하고 불안한 느낌등이라고 단순화 시킬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말하는 위안과 고독이란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순간에 경험되는 기분이나 느낌이나 욕망등이 영성적 위안인지 영성적 고독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느낌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느낌이 일어난 전후 사정을 잘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삶의 일반적인 방향이나 형성되어가는 모양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느낌들이나 기분들 혹은 욕구들을 관찰 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 느낌과 의미 속에서 얻어지는 중간 식별이 바로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이다. 다음의 예들을 통해서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에 대한 식별을 간접 경험해 보자.

경우 A) “K 라는 사람은 대단히 유쾌하고 행복하고 모든 것을 쉽게 생각하는 낙천적인 젊은이다. 그에게 있어서 심각한 관심사가 있다면 즐거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의 친구가 교통 사고로 인해서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때때로 삶에 대해서 불만족해 하고 회의감을 나타내곤 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삶을 심히 불편하고 힘들게 했다.”

K 라는 사람의 영적 상태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그의 유쾌하고 즐거운 전자의 삶의 형태는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영성적 고독’으로 진단되어진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의 삶의 원칙과 관심사는 전적으로 자지 자신에게 국한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욕구나 필요성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더우기 경건한 삶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행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자아만족을 위한 정당화에 불과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K 라는 사람에게 신이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신이다. 그러므로 그가 누리는 평안과 즐거움은 자아 만족을 위함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적인 경험이다. 반면에 후자에서 친구를 잃어버림으로 경험된 느낌등은 전자에 비해서 참으로 고통스럽고 암울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내적 상태가 ‘영성적 위안’이라는 방향으로 바뀌어지고 있다고 진단되어진다. 그의 내적인 소요, 갈등, 공허감, 무의미함등은 확실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는 징조이며, 영적인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K 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성적 위안“은 심리적으로 본다면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경우 B) “P라는 사람은 근면한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그는 L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였고, 슬하에 3살부터 11살 사이에 세 자녀들을 두고 있다. 이 가족은 정규적으로 교회에 다녔지만, 그 외에 교회에서의 다른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년전쯤 P씨는 교회의 기도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더욱 더 큰 헌신을 요구한다고 느꼈다. 그 이래로 그는 교회활동과 장애인들을 돕는 일등의 봉사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가정에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의 아내는 이에 견디지 못하고 남편 P씨와 심한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만약 그의 남편이 그런 활동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를 떠나겠다고 위헙을 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P씨는 오히력 가정을 포기하고 신앙적인 활동을 선택했다. 그러나 P씨는 곧 그런 신앙적인 활동에 대해서 용기를 잃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P씨는 개인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영적인 위안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 경험은 하나님께 끌려가는 경험이고 온전한 복음적인 삶을 이루어가는 듯한 경험이다. P씨는 그러한 경험의 영향아래에서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상황 때문에 P씨의 결단은 비극적인 영성적 고독으로 끝난다. 결과적으로 그가 경험한 영성적 위안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P씨는 보다 선한 것을 추구했으나, 덜 선한 결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처음의 영성적 위안이라는 것에 의하여 P씨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거짓 위안이라고 진단한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거나 심각한 삶의 스타일이나 행동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영성적 위안을 경험한다면, 주의깊게 그리고 보다 넓은 시야에서 분별해야 한다. 경험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전체적인 삶의 흐름을 파악하고 순간의 경험을 진단해야 한다. 어떤 열정적인 영성적 위안을 경험하였을 때 그것은 대부분 주변 상황의 다른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 영성식별의 전통에서 볼 때 실제적인 영성적 위안과 그 이후에 따르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효과로 남겨진 회상의 여파(afterglow)가 있다. 이 둘 사이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여파는 실제적인 영성적 위안과는 달리 영성적 고독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이 때 그 진면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결국은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이러한 경우에도 식별을 멈추지 말것을 권고한다(영신수련, 336). 어떤 영성적 위안이 주는 회상적 효과로 인해서 선택이 잘못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즉시 그러한 선택을 일으키게 했던 감정과 그러한 생각을 하게 했던 지점이 어느 부분이었는지 돌아가 반추하라는 것이다. 그럴때 어느 싯점에서 어느 모양으로 속임을 받게 되었다는 원인을 찾아내고 흩어졌던 영적생활의 혼란과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다(영신수련, 333).
‘영성적 고독’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려고 한다. 영성적 고독이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대해서 저항할 때 일어나는 경험이다. 한 편으로는 그 저항은 의도적으로 할 수 있다. 자신이 저항을 분명히 인식하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저항일 수도 있다. 다음의 예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경우 C) A라는 사람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는 그 결정을 위해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따른 모범을 담은 복음서를 기도의 자료로 삼아 묵상하고 있었다. 그는 기도를 하는 동안 여러 선택의 가능성들 중에서 두 번째의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선택을 따를 경우 오랜 친구와의 우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 친구와의 우정이 썩 마음에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친구와의 우정을 계속하는 것은 기쁨을 주기보다는 오히력 부담을 준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우정을 포기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선택한 두번째의 것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로 A라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상태는 지속적으로 영성적인 고독에 머물게 된다.

경우 D) T라는 목사님이 있었다. 그는 양심적이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며, 매우 헌신적이고 부지런하며 자기 목회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는 분이었다. 그런데 종종 일이 엉망이 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의 일을 게울리하고, 기도를 멈추고, 목회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고, 무기력함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한다. 모든 일이 귀찮은 일로 여겨지며, 쉽게 신경질을 부리게 된다.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수면을 취하나 그 수면이 그를 시원케 해주지는 않는다. 의사는 그가 여전히 건강한 상태이고 우울증도 없다라고 진단한다. 이런 때마다 그는 목사직을 떠나려는 생각도 하게된다.

T 목사는 영성적 고독이 그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을 불행하게 하고 게을리 하게 만든다. 그러나 좀더 인내를 가지고 내면의 상태를 반추해 보고 영성지도자의 도움으로 영성적 고독의 진원지를 발견할 때 오히려 영적인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다. 순수하게 믿음의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영성적 고독은 매우 고통스럽기는 하나, 이 고독으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이 영성적 고독은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나 한 편으로는 오히려 새로운 영성적 성장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고독은 결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케 하고 자극케 하기 위한 또 다른 경험이다(영신수련, 332).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끔 시험코자 하는 고독이다. 그 고독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고 인내로서 대항하면 머지 않아 영성적 위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영신수련, 320-321). 그러면 곧 한단계 성장의 길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이냐시오는 영성적 위안이나 영성적 고독의 경험들을 계속해서 반추하고 돌이켜 볼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하심과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방향을 감지하고 식별하게 된다.

2)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에 대한 행동원칙

이 영성적 고독과 영성적 위안의 기본적인 원칙은 이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영성적 위안의 방향으로 움직여 갈 것이다. 영성적 위안은 우리를 복음적인 삶으로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움직이게 하는 창조적인 감성적 경험이다. 반면에 영성적 고독은 우리를 정반대로 움직인다. 만약 그런 방향으로 함께 움직인다면 결국은 파괴적인 결과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이냐시오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영성적 위안은 따르고, 영성적 고독은 대항하라.” 이런 영성적 위안과 고독의 성질을 잘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방식에 맞는 선택에 이르는데 크게 유익을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중요한 선택을 요구하는 일에 직면한다고 할 때, 여러 선택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느낌들을 면밀하게 점검하라. 그러면 그 느낌들이 일정한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지 혹은 다르게 바뀌어 가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축적된 느낌의 경험을 통하여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을 식별하게 된다. 영성적 위안을 확인할 경우 그것은 곧 선택의 가장 좋은 토양이 된다. 반대로 영성적 고독이 유지될 때 잠시 선택을 보류하며 그 고독에 대항하여 더욱 열심이 기도하며 영성적 위안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3) 세번째 타입의 선택 시기(영신수련, 177): 내면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저런 방향으로 선택할 수 없는 때를 말한다. 이때는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함으로서 보다 이성적인 식별과정을 거치게 된다.
만약 우리가 A 혹은 B 라는 일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먼저 우리의 자세는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진 마음이 아니기에 양쪽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절차를 취한다. 내가 A를 선택했을 때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나열하고, B를 선택했을 때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점을 철저히 나열함으로서 최종적으로 양쪽을 면밀히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다. 그리고 이치가 기울어지는 쪽으로 일단계 결정을 내린다. 다음의 도표가 그 양식이다.

--------------------------------------------------------------------------
A를 선택할 경우 : B를 선택할 경우
--------------------------------------------------------------------------
유리한 점 : 불리한 점 유리한 점 : 불리한 점
--------------------------------------------------------------------------
1.
2.
3.
4.
.
.
.
-------------------------------------------------------------------------
종합
평가
-------------------------------------------------------------------------

이러한 이성적인 관찰과 검증을 통하여 결정한 바를 다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 확인받는 기도를 한다. 이 때 비로소 마음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영성적 위안 혹은 영성적 고독이라는 내면적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영성적 위안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성적 고독이 찾아온다면 결정을 다시 고려해 봄이 바람직하다. 위에서 이성적인 검증을 하는 동안 어떤 편견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번째 시기에 있어서 두 번째 방법을 이냐시오는 제시한다(영신수련, 185, 186). 우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면 나는 어떻게 그에게 권고해 줄 수 있는가를 상상력을 통해서 객관적인 답을 추측해 보라. 다른 하나는 내가 죽음의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상상하고, 그러한 경우 과연 어떤 것을 마땅히 해놓고 떠나야 하는가를 간접 경험해 보는 것이다. 이 식별의 분위기는 물론 깊은 내적 성찰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깊은 기도의 환경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일상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과 감성적인 경험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뜻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III. 결 어

영성식별이란 끊임없는 마음의 성찰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순간에만 필요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영성식별의 훈련을 통하여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삶을 살게 한다. 즉 깨어있는 삶을 살게 하는데 그 근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식별적인 삶이 순간 순간 연결되어질 때 올바른 영적 순례의 길을 따르게 된다. 사실 이 식별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영성적인 노력이다. 이러한 영성적인 노력은 우리 영혼 속에 숨겨두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찾아내고 그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루어 드림으로서 그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려는 데에 있다(빌 2:13). 그런 의미에서 식별의 삶은 우리의 영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 떠나는 내적 여행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영성수련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도원 공동체에서는 공동식별 혹은 집단 식별이라는 것이 있어왔다. 공동체가 사심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분위기라고 한다면 이 개인적인 식별의 원칙을 공동체에 적용하여 활용할 수도 있다. 이 식별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선것처럼 할 수 있는 만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이성을 바르게 활용하는 의도적인 삶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주관적으로 인지하고 그 움직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1994년 8월 29일 기독교 사상 기고

 
 
이전글
 칼융의개성화과정에비추어본아빌라테레사의영적여정의이해(유해룡)
다음글
 내적인 움직임에 대한 인지(認知)를 통한 영적분별(유해룡)
  

     
최대 2000byte(한글 1000자, 영문 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