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주선영
날짜
08/05/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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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내적인 움직임에 대한 인지(認知)를 통한 영적분별(유해룡)
 
 

내적인 움직임에 대한 인지(認知)를 통한 영적분별
(Spiritual Discernment through Perceiving the Interior Movements)

유해룡(영성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본 글은 전통적인 권위와 가르침에 신뢰를 보내기를 꺼려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내적 경험에 더 신뢰를 보내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주관적인 경험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하여 어떻게 영적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각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면에서 감지되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어떻게 성찰하고 분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구체적인 실례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실천적인 유용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논쟁을 통하여 명료한 주장을 끌어내려는 시도보다는 주어진 정보들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해서 그 정보들을 보다 명료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전반부에서는 영적 분별의 필요성과 분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영적 분별을 위한 전제조건을 제시하며, 후반부에서는 실천적 제시로서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과 사람들이 경험하는 내면의 움직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논한다. 1)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공동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믿음을 지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묵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어떤 확신을 주는 데에는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공동체에서 고백하고 있는 믿음이 각 개인 안에서 어떻게 자라가고 있으며, 성취되어져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현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경향도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각 개인의 영적상태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제도나 인적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하나님과의 관계 발전이 오히려 공동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각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내적 갈망을 약화시키거나 좌절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각 개인의 영적인 삶을 돌보아 주어야 할 또 다른 시급한 이유는 오늘 시대 상황이 점점 공동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서양에서는 디지털 코쿤(Digital Cocoon)족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본래 코쿤족이란 안전한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활공간을 즐기는 칩거증후군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외부와의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면서도 칩거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디지털 코쿤족이라고 한다.2) 그러한 사람들이 겪을 미래적 신앙양태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 상태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이러한 세대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신앙생활을 지속하기도 어렵거니와 내적인 성숙을 이루는 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교회는 그들이 어떻게 영적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야할 또 다른 변화의 조짐이 있다고 켐벨 존슨(Ben Campbell Johnson)은 지적한다. 그는 오늘 미국 교회의 영적 흐름을 진단하면서 베이비부머 세대3) 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는 믿음은 있으나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특정한 교파에 소속되지 않는 단체나 근본주의적인 회중들이나, 자기중심주의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양 종교에서 내면의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구도자 유형들이 있다. 세 번째는 역동적인 하나님 체험 없이 교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사람들이 최근에 다시 교회로 복귀하면서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교리나 교회적 권위나 책 속에 갇혀진 가르침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개별적으로 하나님 체험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해 오고 있다.4)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세대 역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다.5) 이들이 지난 세월동안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가 점점 실존적 불안에 직면하면서 새롭게 교회를 찾고 있으며 찾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미국교회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 영향의 구도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움직여 왔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보다는 탈교파주의, 탈권위주의, 탈형식주의를 표방하면서 독립교회로 성장한 교회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새들백 교회, 윌로우 크릭 교회,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 교회 등이다. 그러한 독립교회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형식화된 교리주의나 전통을 배제하고,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이 각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21세기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나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연대는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고 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그 이전 세대보다 더 불안감을 느끼며, 내면적 성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지성적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가 각 개인의 불안과 내적 갈망에 대해서 적합한 답을 제시해 주기를 목말라 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은 선포되어진 말씀을 들음으로서 각각 자기의 영혼 안에서 성령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이러한 활동과 영향력에 대해서 어떤 일깨움을 받고 있으며, 또 그것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반응해야 하는가를 도와주어야 한다. 여기에 비로소 개별적인 영적지도가 요청된다. 헨리 나우웬은 ‘영성지도란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삶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분별하게 하고, 그래서 이 움직임에 대하여 기꺼이 순종하여 영적 삶을 향하여 중대한 결단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6)라고 했다. 윌리암 베리는 영성지도는 “어떤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의사를 전달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사 전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며, 하나님과의 친교를 깊게 하고, 그 관계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가도록,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이다”7) 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작업은 복음 증거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해야 할 몫이지만 오늘날 영적지도를 특별한 영역으로 두는 이유는 현대 교회가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그 사실을 자각적으로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끊임없이 초월자와의 관계를 갈망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심리치료자들이 관찰하기를 ‘정신 질환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메켄지는 “목회자들도 목양의 대상인 성도들로부터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라”고 한다.8) 이러한 현상들은 자신들이 자각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내면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세바스찬 무어는 그의 책 “Let This Mind Be in You(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라는 책에서 우리 모두는 ‘내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알고자(I know not what)’9) 하는 갈망이 있다고 한다. 뚜렷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요, 혹은 내가 분명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즉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 신비 그 자체이다. 그러한 갈망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우리의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적극적으로 한 인간을 성숙되어 가는 방향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경험들의 기원들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다.

3. 영적분별은 가능한가?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자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가?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 내적 움직임들이 영의 감동에 의한 것이라면, 해석의 문제이거나 혹은 각각 다른 주장들을 쏟아내도록 하는 서로 다른 어떤 영의 기원들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하면서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냐하면 예언은 방언에 비해서 그 결과가 더욱 분명하며, 실제적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더 유익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이라고 주장되는 예언의 메시지들까지도 자주 그 결과가 상반되게 나타나서 교회에 혼란을 가져오곤 했기 때문에 그 진정성에 대한 분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영의 기원들을 판단해 보라는 의미로 분별(diakrinein)을 권하게 된다.(고전 14:29)10)
요한 공동체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레이몬드 브라운은 요한의 이러한 주장은 구약과 꿈란 공동체에서 나타난 영들의 사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11) 천상의 힘들이 인간사에 영향을 미치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두 영들 즉 진리의 영들과 악한 영들을 지목하셨다. 의인의 자녀들은 진리의 영들에 영향을 받고 빛 가운데에서 행하고, 악의 자녀들은 어두움의 영들에 영향을 받고 어두움 가운데에서 행하게 된다’.12) 신명기 18: 15-22절에서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메시지와 다른 신들로부터 비롯된 메시지와의 분별을 요청하고 있다. 대립되는 이 두 영들의 기원을 생각하면서 요한은 인간의 영에 영향을 미치는 성령과 악한 영을 시험하여 분별하라(dokimazein)13) 고 한다.
요한이 영의 분별을 요구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조명하신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은 영의 조명을 받는다(요 1:9). 진리의 성령은 내면으로부터 우리를 가르친다. 바울도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그의 영광의 빛을 비추고 있으며(고후 4: 6),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그의 결단에 의해서 그를 섬기도록 하신다(빌 2: 13).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당신의 뜻을 조명하신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제로 기독교 역사 안에서는 극단적인 조명론자들(illuminists)이 나타나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전적으로 내면의 빛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련의 성경의 가르침이나 일체의 권위나 다른 사람들의 개입을 불허한다. 그들은 초기교회와 같이 영적인 감동에 의한 질서들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교회의 분열을 야기 시키기도 했다.14)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에 대한 분별은 전적으로 특별한 은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이 자주 교회 안에서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분별이 교회 안에서 진정성을 얻는데 실패하곤 했기 때문이다. 신실하다고 여기는 그들이 왜 하나님의 일을 감지하는데 실패를 했는가?
조명론자들은 인간의 주관성은 언제나 환상에 빠질 수 있다는 인간의 죄악성을 간과했다.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은 당신의 뜻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는 죄악들을 조명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감을 면밀하게 해석해 내는 작업이 없는 직관적 판단은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성인들도 때때로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내적 비젼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오류를 범하였다.15)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영감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비상한 언어로 다가오시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것은 육체적인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영적인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앎의 근원으로서의 이해력을 허락하시는 초월적인 사건이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은 모든 한계성과 선입견, 편견, 오류 등을 지닌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속에 조명하고 계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모습이 되는 것을 멈추게 하시지는 않는다.17)
그러므로 분별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분별은 반드시 객관적인 절차에 의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조명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의 의사전달이 표현될 때 어떻게 진정성18) 을 지니게 할 수 있는가? 분별이란 누구라도 적합한 절차와 과정을 따라 행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술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은 아니다. 분별 기술이 진정성 있게 사용되려면 먼저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들에 의해서 적응되어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이 언급한 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골 1: 9; 고전 2:10-16).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알려진 내면의 빛을 분별함에 있어서도 기술 이전에 성경적 가치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롬 12: 2).

4. 영적분별의 전제로서의 회심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외쳤다. 믿음은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방향 지어진 내적 의지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마음의 전향이 없이 복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응답할 수 없다. 보통 신학적 진리나 윤리적 판단을 정보의 부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충분히 정보를 획득하면 바른 판단을 하게 되고, 바른 선택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동일한 정보와 증거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계속적으로 더 많은 정보와 증거들을 가지고 수많은 논쟁들을 벌려왔지만, 왜 서로 다른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가? 신앙적 진리와 도덕적 판단은 지성적 통찰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되어진 내적 성향에 의한 의지적인 선택이라고 듀베이는 주장한다.19)
이 문제에 대해서 맥스 쩌르위크라는 성서학자는 엡 4: 17-19절을 주석하면서 악한 행위들로 진리를 막는 그러한 일들의 뿌리는 악한 의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잘 알 수도 있고, 잘 알기도 하지만,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막는다.20) 러시아의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도 이러한 가르침에 상응한 이야기를 남긴바 있다. “진리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이 오류가 더 편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21) 각 사람에게는 보기를 원하는 것이 있고,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이 있다. 면밀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이러한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죄에 의해서 어두움이 들어오고, 거룩함에 의해서 깨우침이 야기된다. 어거스틴은 이것은 하나의 질병이며, 그 질명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이다. 그것은 의사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병자가 치유 받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라22) 고 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요한복음에서도 지지를 보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들이 하는 행동은 그들의 아비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요 8: 38).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보나 지성적인 성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아비 즉 악마에게서 나왔고,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요 8: 43-44).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요 8: 47). 목자와 양의 이미지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꺼이 듣고 따르는 것은 그가 듣고자 하고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요 10: 26-27). 그러므로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나 잘못된 지성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크리소스톰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가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23) 즉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누가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라고 말한다. 그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조상들의 귀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님을 향하여 의도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영의 실체를 감지할 수 없기에 영적분별은 가능하지 않다. 기독교적 상황에서의 영적분별은 예수님을 향한 전향적인 마음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회심이라고 말한다. 진리에 대한 인식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회심에 대해서 시나이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대한 이해는 진리에 참여하고, 삶을 통하여 진리를 맛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24)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들의 심령 깊은 곳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은 그 영혼 안에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시고,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자원하는 심령을 주신다(시 51: 8-14).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면서 회심의 삶이 천국을 향한 준비조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마 4: 17).
이러한 회심에 대한 설명은 로너건의 신학방법론에서 보여준 대로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수용으로부터 주관적인 수용으로 바뀌어지면서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25) 의지적인 측면으로 회심이 발전되면서 의지는 진리와 옳음을 향하여 방향지어지고, 주의깊게, 지성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책임있게 그 선택을 향하여 의지를 일으킨다.26) 그것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느낌과 성향과 생각과 욕구가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여 간다. 그러므로 회심한 사람들이 영적성장을 지향하고 있는 내면세계를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서 비로소 영적분별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듀베이는 말하기를 영적분별에 있어서 필요한 기술은 식별과 관련된 전 과정들 중의 2%에 불과하다고 한다.27) 나머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2%에 대한 논의이다. 전자의 98%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후자의 2%는 합리적인 지성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습득이 필요하다. 그 2%가 습득되지 않으면, 영적분별은 특정한 은사주의자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의도적으로 영적인 성숙을 꾀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분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5.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분별규범

이냐시오는 그의 [영신수련]에서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 I, II”를 제시하고 있다. 이 규범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내적 움직임들과 다른 영의 영향을 받은 내적 움직임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이냐시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28), 이전부터 전래되어 오던 영적분별에 대한 교부들의 지혜들29)을 조직적으로 모으고 실용화 시킨 규범들이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단계적으로 두 종류의 "규범I, II"를 제시하고 있는데, "규범I"은 [영신수련]의 첫 단계인 첫째주간을 마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규범들이다. [영신수련]에서의 첫 번째 주간이란 일반성찰, 특별성찰, 원죄와 개인의 죄와 징벌에 대한 묵상 등을 통하여 회개를 경험하도록 하는 단계이다.30) 이 규범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회심을 경험하고 그를 쫓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분별 규범이다.
"규범 II"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묵상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더욱 가까이에서 그를 따르고자”31) 하는 사람들이 성숙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규범이다. "규범 II"는 “규범 I"과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전 규범을 바탕으로 하는 보다 세련된 분별규범들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규범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규범 I"에 주로 국한하여 논의를 하고자 한다. 이 규범에서 핵심적으로 이해해야 할 원리들과 개념들은 첫째, 악신과 선신의 속성과 작용의 원리들, 둘째는 그 움직임의 현상과 방향들을 규정해 주는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이라는 개념들이다. 분별 규범들 I, II 모두는 기도의 환경에서 가장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실존과 임재를 깊이 경험하고자 할 때에 이 분별규범은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32)

1) 선신과 악신의 작용의 원리들

이냐시오는 “영적분별 규범I”의 첫째와 둘째 규범에서 선신(good spirit)과 악신(evil spirit)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 두 영의 실체가 심리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규범에서는 거듭해서 죄를 짓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를 말한다. 이 사람에게 악신이 작용을 하면 그 내면은 더욱 더 관능적인 쾌락과 오락을 상상하게 하면서 내적 번민과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에 선신이 작용을 하면 양심에 자극을 일으키면서 내적 번민과 혼란을 야기 시킨다.33) 둘째 규범에서는 첫째 사람과는 반대로 보다 더 온전한 삶을 위해서 자신을 정화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악신이 작용을 하면 그 내면에 공포와 불안과 슬픔을 일으켜서 영혼의 진보를 막으려 한다. 반면에 선신이 작용을 하면 본래적 열망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용기와 힘과 위안의 눈물과 좋은 느낌과 평화를 맛보게 되며, 그 결과로 더욱 온전한 선(善)에로의 진보를 가져온다.34)
이 규범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사용하고 있는 선신과 악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냐시오는 선신과 악신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심리적으로 겪는 내적 투쟁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세속적인 야망이 흔들리면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전환을 꿈꾸게 된다. 이 때 이냐시오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이 둘의 세력이 투쟁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의 순례여정 중의 하나인 만레사에서의 수련기간 동안 겪었던 내면의 투쟁도 있었다. 여기서 그는 “기이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복음을 받고, 가르침과 비추임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물을 보게 되었고, 상이한 영(靈)들을 분별하고 시험할 줄 알게 되었다”35)고 한다. 이냐시오는 하나님의 계시가 일상생활 속에서 초월적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된다고 믿는 조명론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일상생활 동안에 인간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경험에 대해서 그의 자서전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다루듯이 그를 다루셨다. 그 이유가 본인의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이나 우둔한 머리 때문이었는지, 따로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런 식으로 다루신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고 또 항상 그렇게 믿어 왔다.”36)
이냐시오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유형으로 가르치고 접촉해 오는지를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선신(good spirit)과 악신(evil spirit)37) 의 용어를 사용했다. 이냐시오는 그의 [영신수련]에서 성령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영신수련] 곳곳에서 천사(good angels)나 선신(good spirits)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38) 그는 중세 교회에서 믿었던 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개인적인 접촉을 하고자 할 때에 선한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다고 믿었다.39) 이건에 따르면 이냐시오가 사용하고 있는 선한 천사 혹은 선신 등을 시대상황을 고려해 이해한다면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성령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좋다고 한다.40)
이냐시오가 사용하고 있는 악신에 대해서는 선신에 대한 이해보다 복잡하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그의 분별규범에서 악신에 대해 훨씬 많은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규범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성장을 열망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미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그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지배를 거스르는 세력을 분별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세력을 일컬어 이냐시오는 악신 대신에 자주 “원수”41) 라는 말로 대체 사용하고 있다. 그 원수를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기를 “인간본성(혹은 인류)의 원수”42) 혹은 “우리의 원수”43) 라고 한다. 이 원수는 신약성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탄을 경험적인 측면에서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44) 이냐시오는 악한 영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는 일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경험적인 측면에서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내면의 움직임들, 생각들, 감성들을 자극하는 반영성적인(antispiritual)45) 세력들을 기억하면서 악신, 악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46) 이냐시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의 실체가 무엇이든지간에 그 세력에 민감하여, 반영성적인 세력을 인식하고 저항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영혼을 준비시켜 주는 일이었다.

2) 선신과 악신의 분별을 위한 심리적 작용

이냐시오의 "분별규범I“의 둘째 규범은 의도적으로 영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효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선신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성령의 요구에 자연스럽게 굴복할 수 있기 때문에, 내면에서의 움직임은 매우 부드럽고 평화롭다. 때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용기와 힘과 눈물을 줌으로서 성장을 향한 장애물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47) 이냐시오는 이 규범에서 선신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효과에 대해서 특별히 “용기와 힘(animo y fuerzas)"을 강조한다. 이냐시오는 곳곳에서 힘(fuerzas, energy)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규범 I의 열째 규범에서 ‘위안(영신적 위한: 곧 이어서 그 의미를 다루게 될 것임)중에 있는 자는 다음에 겪을 고독의 처지를 위해서 새로운 힘(renewed energy)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48) 고 한다. 왜냐하면 영신적 고독(이후에 다루게 될 것임)은 영적성장에 저항하는 경향으로서 그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성장과 퇴보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용기와 힘’49) 이라는 말과 관련해 볼 때에 육체적인 힘이나 활력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용기를 일으킬 수 있는 의지적인 힘(volitional energy) 혹은 영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50) 다른 성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마음을 주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의지적인 힘이 절실하다. 선신은 바로 이러한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 된다.
선신의 두 번째 효과는 명료함과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는데 있다. 악신이 영혼에게 거짓 이유를 불러일으켜서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반면에,51) 선신은 이성의 판단력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한다.52) 즉 악신은 거짓과 혼란을 야기 시키지만, 선신은 명료함과 이성적 판단을 하도록 한다. 그 결과 선신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리에 대한 판단을 하게하며, 건강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참회의 심정을 가지도록 한다. 더욱 분명하게 된 이성은 혼란케 하는 모든 거짓 이성적인 작용들을 제거함으로서 영혼의 진보를 더욱 촉진시킨다.
악신의 작용은 선신과는 정반대로 어두움과 두려움과 혼란과 균형 잡히지 않는 감정과 비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게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냉담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용기를 잃고 거짓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악신의 책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죄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부터 후퇴하게 하고, 영적진보를 가로막는다. 악신으로 인한 마음의 움직임 그 자체가 죄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후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악신의 영향 자체가 영적진보의 후퇴도 아니다. 그러한 부정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움직임이요 세력일 뿐이다.53) 이러한 움직임에 직면한 사람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54) 그래서 이냐시오는 선신과 악신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내적인 움직임을 분별하기 위하여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이라는 준거(準據)틀을 제시한다.

3)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

영적분별을 위한 규범I의 셋째 규범과 넷째 규범에서 영신적 위안(spiritual consolation)과 영신적 고독(spiritual desolation)의 특징과 성격들을 묘사하고 있다.55) 위안과 고독은 선신과 악신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나 심리적인 경험들을 뛰어넘는 어떤 방향성과 예측되는 결과들을 함축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들이다.56)그래서 단순히 위안이나 고독이라 하지 않고 영신적 위안이나 영신적 고독이라고 표현한다. 영신적 위안인지 영신적 고독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전달되는 심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에 작용하고 있는 영적인 기원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 기원들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느냐 따라서, 즉 선신이냐 악신이냐에 따라서 내면에 전해지는 감성적인 경험들이 다르다.57)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위안과 고독이라는 경험들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58) 첫째, 위안과 고독은 그 말들이 전해주는 심리적 작용 즉 그 말에 상응하는 감성적 느낌들을 수반한다. 둘째는 그러한 느낌들을 일으키게 하는 주관적 기원들이 있다. 셋째는 그 주관적인 기원들이 각 사람들에게 인지적이고 감성적인 행동이나 결단에 이르도록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구성요소에 비추어서 내적인 움직임들이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인지 혹은 영적인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나 고독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A. 영신적 위안

“분별을 위한 규범 I”의 셋째 규범에서 이냐시오는 영신적 위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영신적 위안이란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하는 모든 것과 사람을 천상의 일들과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가는 모든 마음의 기쁨을 말한다. 그 결과로서 영혼이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린다.”59) 이 규범을 앞에서 제시한 위안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면 영신적 위안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첫 번째 구성요소로서, 위안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심리적인 반응을 본다. 안식과 평화, 기쁨과 감사라는 감성적 흐름들이 있다. 두 번째 구성요소에서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간행동의 주관적 기원에 대한 이해이다. 그 기원은 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규범에서 그 기원을 암시하는 문장인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하는”이라는 말에 주의해 보자. 여기에 더한다(increase)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믿음, 소망, 사랑의 깊이가 더해서지고 내면화 되어 각 사람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보다 완전한 헌신에로 나아간다. 둘째, 믿음, 소망, 사랑의 행동들이 보다 확고해져서 어떤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셋째, 믿음, 소망, 사랑이 더욱 순수해져서 불순한 인간적 동기가 정화되어 보다 이상적인 믿음에로 성장한다. 넷째,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이 더욱 용이해지고, 그러한 삶의 선택과 결단에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60) 이러한 상태로 그 믿음생활이 진전한다는 것은 그 움직임 이면에 선신(성령)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세 번째 구성요소로서 그 위안의 결과로 기대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에 뿌리를 둔 영적생활이 보다 온전한 믿음생활에로 성장해 갈 것이다. 이러한 구성요소가 만족될 때에 그것을 일컬어 영신적 위안이라고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A라는 사람은 자신이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바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즉 그로부터 동일하게 존중함을 받았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A라는 사람은 자기 내면 안에서 한껏 기쁨과 감사의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위안의 세 가지 구성요소에 따르면 첫째 위안에 상응하는 기쁨과 감사라는 심리적인 반응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심리적 반응이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뿌리를 둔 신앙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과 감사라는 느낌이 A라는 사람의 영적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즉 그 느낌들은 영적인 성장과 방해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중립적인 것들이다. A가 경험하고 있는 기쁨과 감사는 어떠한 영의 실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느낌들이다. 그리고 이 위안의 결과로서 A의 영적생활이 어떻게 변화될지에 대해서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위안이라는 심리적 결과는 있으나, 특정한 영적인 기원으로부터 발원된 것이 아니기에, 이것은 심리적 위안에 불과한 비영성적 움직임(nonspiritual movemen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토너는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의 실현이 반드시 영신적 위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영신적 위안이 없는 어떤 위안도 영적일 수 없다61)라고 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그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과 인식이 없다면 결코 영신적 위안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성숙되어 가는 믿음 생활 속에서도 평화, 기쁨, 감격 등을 맛볼 수 없다. 영신적 위안이란 믿음생활에 대한 확신과 그 경험의 원천이 되는 감성적 느낌이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위안이 일어날 때에 영적인 출처에 근거하지 않는 단순한 위안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영적분별에 임해야 한다. 심지어는 성경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만족과 기쁨도 단순한 미학적 위안이 될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영적인 삶을 촉진케 하는 경험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학문적 탐구의 자세에 머물러 있다면, 그 때 경험하는 위안도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일 수 있다(겔 33:30-32절 참고). 그러면 왜 영신적 위안과 단순한 심리적 위안에 대한 구별이 필요한가? 만약 단순한 심리적 위안을 선신의 작용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 단순한 심리적 위안으로부터 오는 생각들을 하나님의 의향으로 오해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B. 영신적 고독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으로 고독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황폐하고, 황량하고, 쓸쓸하고,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비관적이고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위안이나 고독의 구성요소들의 측면에서 볼 때, 첫 번째 이것은 구성요소인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단 고독의 상태라고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단순한 고독이 아니고, 영신적 고독을 말하고 있다. 규범I의 네째 규범에서 단순한 심리적 고독과 영신적 고독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영신적 고독에서는 ‘영혼의 어두움과 어지러움과 비열하고 실망스럽고 불안하여 결국은 영혼이 게으르고 냉담하게 되어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62) 이 규범에서 두 번째의 구성요소인 그 느낌을 이끌어 가는 출처가 무엇인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다룬 영신적 위안의 상태인 믿음, 소망, 사랑을 더하는 영적인 성향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심리적으로 나타나는 감성적 느낌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악신의 작용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구성 요소로는 그 충동에 그대로 순응한다면 비참한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 영적생활이 후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구성요소가 만족될 때에 비로소 영신적 고독이라고 한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하고, 병이 들고, 지나친 책임이나 일로 인한 중압감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등으로 야기되는 고독의 상태는 영신적 고독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삶을 파괴하거나 후퇴하게 하는 데에 간접적으로는 영향을 미칠 수 있어도 직접적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63) 즉 영적인 실체의 작용에 의한 충동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고독일 뿐이다.
영신적 고독을 경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인 삶이 파괴되거나 퇴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냐시오는 영신적 고독은 “희망과 사랑이 없이 불신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상태”64) 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파괴적인 힘이 아니고, 성향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냐시오는 그 성향을 저항하거나 역습을 하도록 권고한다.65) 왜냐하면 영신적 고독이란 실패 그 자체라기보다는 유혹이요, 시험이기 때문이다.66) 영신적 고독의 상태를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여전히 악신과 더불어 복합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67) 그 상태를 능히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 그런 사람들이 비록 직접적으로 성령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미 부여받은 은혜와 인간적 노력으로 충분히 영신적 고독에 대항할 수 있다고 할 만큼 이냐시오는 회심한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68)

6. 나가는 말: 영적분별의 유용성과 미래적 연구과제

영적분별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각 개인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여 최선의 삶을 선택하기 위함이다.69)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여러 모양으로 드러내시지만 가장 진정성 있는 의사소통의 통로로서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선택하신다. 그래서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복음서의 장면들을 묵상하게 하면서 각 사람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각 개인이 정직하게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그는 성령의 작용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의식적으로 성장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내면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움직임의 기원을 파악함으로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최선의 삶을 선택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우리의 내면은 언제나 경쟁적으로 우리의 주목을 끌려는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움직임들이 일정하게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인간 본성적인 것, 성령에 의한 것, 악한 영에 의한 세 가지 기원들에서 비롯된다.70) 그것을 분별할 때 비로소 순간 순간 바른 선택을 하면서 영적인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다. 그래서 휴츠렐은 영성식별이란 어떤 움직임들이 빛의 길을 따르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그 기원을 판단하기 위해서 내면의 경험들을 분류하는 작업이라71) 고 말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신중하게 분별하기 위해 선행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회심이다. 그래서 분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별에 대한 지식과 정보와 기술 이전에 회심을 경험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회심의 상태를 기울어지지 않는 중용(indifference)이라고 한다. 이냐시오가 분별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묵상의 자료로 제시하는 “원리와 기초”에서 그 중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중용을 지녀야 할 것이니 즉, 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최고 목적에로 보다 더 잘 인도하는 사물만을 원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72) 여기서 보여준 중용이란 인간의 창조목적과 그 목적에 맞갖도록 그 중심을 세우고 그 나머지의 사물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 중심에 기여하는 만큼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할 수 있는 초연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냐시오의 영적분별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기준이 되어서 성령의 움직임과 악한 영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마음이 중심이 되어 다른 움직임들을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러한 분별의 능력과 응답의 여부에 따라서 그 만큼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게 된다.73)
여전히 이 논문의 후속작업으로 지속되어야 할 연구과제가 있다. 예를 들면 각 사람들이 내면의 움직임들을 분별한 후에, 그 각각의 경우에 어떠한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과정들과 신학적 논의들이 필요하다. 왜 영신적 고독에 이르게 되는지, 그 각각의 원인들은 무엇인지, 그러면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영신적 위안에서도 분별이 필요하다. 간교한 악한 영의 속임수로 인한 거짓위안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가 주로 [영신수련]의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들 I"에 초점을 맞추면서 분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도모했다면, 후속과제는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 II"에서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분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

주제어 - 영적분별(spiritual discernment),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 영신적 위안(spiritual consolation), 영신적 고독(spiritual desolation), 선신(good spirit), 악신(evil spirit), 회심(conversion)


1) W. A. Barry and W. J. Connolly, The Practice of Spiritual Direction, 김창재, 김선숙 역, 『영적 지도의 실제』(왜관: 분도출판사, 1995), 제2장.
2)『東亞日報』, 2005. 11. 1. A13쪽.
3) 제2차 세계 대전후 1946-1964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들로서 이들이 현재 미국의 각 분야에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미국 총인구의 26.9%인 7800만명이나 된다:『東亞日報』, 2005. 11. 3. A5쪽 참고하라.
4) Ben Campbell Johnson, Speaking of God (Louisville : Westminster/John Knox Press,1991), pp.19-20.
5) 1955-63년생이다:『東亞日報』, 2005. 11. 1. A쪽 참고하라.
6) Ben Campbell Johnson, 위의 책, pp. 25.
7) W. A. Barry and W. J. Connolly, 위의 책, p.20.
8) William A Barry, Discernment in Prayer: Praying Attention to God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1999), pp.16-17.
9) Sebastian Moore, Let this Mind Be in You: The Quest for Identity through Oedipus to Christ(New York: Winston Press, 1985), p.40.
10) William F. Orr and James Arthur Walther, I Corinthians 14: 29.,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6), p. 304, 306.
11) Raymond E. Brown, The Epistles of John, John 4: 1-6, "Anchor Bible," p. 487.
12) 1QS(꿈란 사해사본) 3: 17-21을 위의 책에서 재인용.
13) 이 말은 ‘시험하다, 시도하다, 실험하다’라는 의미로 신약성서에서 22번이나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이 말의 포괄적인 의미는 좋은 것인가 가치 있는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돈 혹은 사람이나 포도주를 실험하고, 증명하고, 분별하라는 의미이다: Thomas Dubay, Authenticity : A Biblical Theology of Discernment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77), p.102.
14) 위의 책, pp. 51-53; Ronald Knox, Enthusiasm, p. 581
15) Thomas Dubay, 위의 책, p. 45
16) 십자가의 성 요한, [갈멜의 산길], 최민순 역, (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6), 제2권. 28장, 2.
17) 위의 책, 제2권, 32장, 4;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5), pp. 216-217.
18) 진정성(authentikos)이란 ‘원래의’(primary 혹은 original)라는 의미이다. 즉 속임수 없는 실재를 말한다.
19) Thomas Dubay, Authenticity, p.192, 200-3, 205
20) Max Zerwick,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NTSR 16 (London: Burns and Oates, 1969), p.117을 Dubay, Authenticity, p. 192에서 재인용.
21) Dubay, 위의 책, p.193.
22) Augustine, Vernon J. Bourke edit., City of God, (New York: Image Books, 1958), bk. 6, ch. 1.
23) Patrologia Graeca-Latina 59: 338 in Ra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The Anchor Bible", p. 406.
24) Writings from the Philokalia on Prayer of the Heart, trans. E. Kadloubovsky and G.E.H. Palmer (London: Faber and Faber, 1951), p.42를 Dubay, 위의 책, p. 195에서 재인용.
25) 위의 책, p.202.
26) Daniel A. Helminiak, The Human Core of Spirituality, (New York, SUNY, 1996), p. 96
27) Thomas Dubay, 위의 책, p.16.
28) Ignatitus Loyola, The Autobiography of St. Ignatius Loyola with Related Documents, 한국예수회 역,『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997) ; Jules Toner, A Commentary on Saint Ignatius' Rules for the Discernment of Spirits (Anand : Gujarat Sahitya Prakash, 1982), p.8.
29) 유해룡, 위의 책, pp.248-251 참고.
30) [영신수련] (23-90). 번호는 페이지가 아니고, 문단번호임.
31) [영신수련] (104).
32) David L. Fleming, Ed., Notes on 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Ignatius of Loyola, Charles J. Healey, "Prayer: The Context of Discernment," (St. Louis, Mo.: Review for Religious, 1981) p.196.
33) [영신수련] (314).
34) [영신수련] (315).
35) [이냐시오 로욜라 자서전], pp. 56.
36) 위의 책, p.63.
37) 이 용어는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한국어판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38) [영신수련] (315-318).
39) Jules Toner, A Commentary on Saint Ignatius' Rules for the Discernment of Spirits, p. 32
40) Harvey D. Egan, The Spiritual Exercises and the Ignatius Mystical Horizon (St. Louis: The Institute of Jesuit Sources, 1976), pp. 120-122
41) [영신수련](8, 12, 217 274, 314, 320).
42) [영신수련](325, 334).
43) [영신수련](314, 320, 325-27, 329).
44) Jules Toner, 위의 책, p.33.
45) 이냐시오의 내면의 움직임들을 네 종류의 부류로 이해할 수 있다. spiritual/antispiritual, spiritual/nonspiritual.: Jules Toner, Commentary p.115-121, pp.140-141 참고.
46) Toner, 위의 책 p. 32.
47) [영신수련] (315).
48) [영신수련] (323).
49) 용기와 힘은 각각의 의미라기보다는 이냐시오가 쓰고 있는 하나의 복합어 혹은 숙어적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Jules Toner, Commentary, p. 65 참고하라.
50) 위의 책, p. 65.
51) [영신수련] (315).
52) [영신수련] (314).
53) Jules Toner, 위의 책, p. 59
54) 그 대처에 대해서 [영신수련] (318-322)를 참고하라.
55) [영신수련] (316-317).
56) David L. Flemming, 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Ignatius: a Literal Translation and a Contemporary Reading, (Anand : Gujarat Sahitya Prakash, 1978), p. 206.
57) [영신수련] (335)을 참고하라.
58) Jules Toner, 위의 책, p. 123.
59) [영신수련] (316).
60) Toner, 위의 책, pp.104-105.
61) 위의 책, p. 110.
62) [영신수련] (317).
63) 위의 책, p. 131.
64) [영신수련] (317).
65) 이냐시오는 agere contra(반대방향으로 행하라)라는 원리를 제공한다:[영신수련] (13, 97).
66) [영신수련](319-322).
67) Jules Toner, Spirit of Light or Darkness? (St. Louis, Mo: The Institute of Jesuit Sources, 1995), p.72.
68) Toner, A Commentary on Saint Ignatius' Rules, p. 157.
69) Piet Penning de Vries, Discerment of Spirits (New York, Exposition Press,1973) p. 6
70) [영신수련] (32).
71) John Futrell, Ignatian Discerment (St. Louis, Mo.: American Assistancy Seminar on Jesuit Spirituality, 1970), pp. 47-48.
72) [영신수련] (23).
73) 스위스의 심리학자 잔 피아제(Jean Piaget)는 발달과정에서 성숙이란 실제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내적인 움직임들을 분별하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David L. Fleming, Ed., Notes on 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Ignatius of Loyola, David T. Asselin, "Christian Maturity and Spiritual Discernment," p. 204.




Spiritual Discernment through Perceiving the Interior Movements

Hae-Yong You

This paper shows how we can make discernment of spirits through examining one's interior movements so that one can progress one's faith life rooted in Christian faith, hope, and love. Traditionally it has been known that the discernment of spirits can be made only by the persons who was given special gift. The paper, however, discusses if ordinary Christians can make spiritual discernment.
Discernment processes may be useful to examine one's interior movements, but the authentic mind of the person who attempts to detect the movements or spirits is required prior to using the skillful discernment processes. The person must be authentic to the extend that he lives the value of the Gospel through conversion. Therefore, one's conversion is the most important condition of detecting the mind of God which is revealed in the interior movements of the human mind. Under the precondition of conversion, he/she is able to make use of discernment processes. In this paper, "Ignatius' Rules for the Discernment of Spirits" which is included in the Spiritual Exercises of Ignatius of Loyola is adopted as an example of discernment processes. In this rules there are two sets of instructions part in which the Rules I is fundamental in the discerning spirits and the Rules II is the advanced rules with more accurate ways of discerning spirits based upon the Rule I. For the most part, the Rules I was taken to discuss the subject of the paper.
Ignatius' rules show the wisdom and the ways about how to distinguish inner movements of the Holy Spirit from those that come from any other source, that is, evil spirit or one's own thoughts, and about how to maintain openness to the Holy Spirit all the times. These rules are concerned with inner movements in the individual discerner's own mind and heart prior to his/her manifest acts flowing from these inner movement. They tells us how to discover whether the movements are prompted by the good spirit(Holy Spirit) or evil spirit.
Ignatius offers the theological terminology, spiritual consolation and spiritual desolation in order to discern the sources of the inner movements. Spiritual consolation and spiritual desolation are to some extent different concepts from psychological consolation or desolation. For example, the essential structure of spiritual consolation according to Ignatius implies three related parts: first, consolation in the exclusive meaning which is affective feeling such as peace, joy, quiet, exaltation and the like; second, the causes or sources, subjective and objective, of consolation which give rise in one way or another to the feelings of consolation; and third, consequences of consolation, our ways of perceiving and of responding affectively which are influenced by the feeling of consolation. Spiritual desolation is applied to the same principle as above.
Once we recognized which spirits influence our interior movements and whether they are spiritual consolation or spiritual desolation, we would make decision on how we should take actions according the mind of God. Therefore if we were the person who was devoted to progress in faith life, it is sure that we would be capable of discerning the spirits which bring about inner movements according to the Ignatius' ru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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