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주선영
날짜
08/06/18 17:45

Hit

2327
제 목
 야곱의기도(오방식)
 
 

야곱의 기도:

오방식 (장신대 영성신학)

이 글의 목적은 창세기 32장 22절에서 33절까지 나타난 야곱의 기도를 중심으로 ‘기도의 본질’에 대하여 고찰하는데 있다. 이 연구의 관심이나 방법론은 성서본문을 주석하거나 해석하여 창의적인 성서적 이해의 관점이나 해석을 추구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글은 야곱의 기도본문에 대한 여러 기독교 구약학자들의 해석학적인 통찰과 유태교신학자(랍비문학 연구가들)와 문학가들(또는 영성가들)의 통찰과 표현을 기초로, 먼저 성서적 기도이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기도의 이해와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성서의 본문을 살핀다면 몇 개의 문장으로 충분히 요약이 되어질 것이다. 필자의 창의적인 접근과 연구나 전개의 방법은 이 연구를 통해 발견한 야곱의 기도에 대한 성서적 기도이해를 기독교 영성전통의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성서적 기도이해를 보다 깊이 있게 확장시키고 발전시켜 기도의 참된 본질을 밝히고, 본문을 기초로 한 기도이해를 포괄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야곱의 기도에 나타난 기도의 본질은 첫째, 하나님과의 만남; 둘째, 삶의 현실과의 만남; 셋째, 자기 자신과의 만남; 넷째, 사명과의 만남의 측면이 있다. 본문에 나타난 기도의 이 네 가지 관점을 어떻게 유출해낼 수 있을지를 우선적으로 밝히고, 이 야곱의 본문을 기초로 성서적인 기도의 이해와 본질을 체계적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영성과 기도: 야곱의 기도(창세기 32:22-32)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영성과 기도와의 관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두드러진 몇 가지 현상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대과학의 발전이다. 한 미래학자가 인류 문명의 발전 가속도에 대하여 매우 인상적인 말을 했다.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어온 500만년을 30일로 축소하여 볼 때 수렵시대는 29일 2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고 농경시대는 1시간 27분, 산업시대는 1분 50초, 정보시대는 50초 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1) 이 수치는 인류 문명의 변화 가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십 수 년만을 돌아보더라도 얼마나 세상이 편리해졌고,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는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멀리 있는 지인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고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여러 날이 소요되었다. 요즘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컴퓨터 전자우편이 있어서 아주 쉽고 용이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가 있다. 또 컴퓨터 웹싸이트(Website)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도 있다. 집안에 있으면서 컴퓨터나 전화를 사용해서 전 세계의 여행정보를 얻고, 원하는 여행을 예약할 수도 있다. 전에는 돈을 송금하기위해서는 꼭 은행에 가야만 했는데, 이제는 컴퓨터로 직접 돈을 송금하거나 또는 자동이체를 통하여 지불할 수도 있게 되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오늘날의 현대과학은 엄청난 편리와 여가를 현대인들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반면에 과학의 발전에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핵무기나 생 화학무기의 위협, 환경 파괴와 환경오염, 인간 복제(human cloning)논란 등에 대한 뉴스를 매일 접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1년 미국 뉴욕시에서 발생한 9.11사태와 그로 인해 불거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의 아프가니스탄침공, 그리고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보듯이 현대 과학의 산물인 현대무기는 이 지구를 언제라도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현대과학이 현대인들에게 미친 이보다 더 치명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과학의 방법론이 준 새로운 인식론에 대한 문제이다. 이 과학적 방법론은 ‘반복된 실험과 객관적인 관찰’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 즉 객관적 증명에 기초한 진리만을 인정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뉴욕 주 코넬이라는 지역에 있는 유명한 그릇 제조회사인 코닝의 박물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이 박물관안에 유리그릇을 시범적으로 직접 만드는 것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곳이 있어 관람을 했는데, 시범자는 막대기 끝에 유리공을 메어달고 그것을 용광로에 집어넣을 때마다 용광로 안의 온도를 정확히 알고 관람자들에게 알려주고 설명도 해주었다. 시범자가 유리공이 달린 그 막대기를 이리 저리 움직이니까 차츰 차츰 어떤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을 하더니, 마침내 막대기 끝의 조그만 유리공이 변하여 예쁜 화병이 만들어 졌다. 이 시범자는 유리의 불순물이 몇 도에서 다 녹는지, 유리공을 몇 번 용광로에 넣어야 하는 지, 몇 분 동안 그 유리가 용광로에 있어야 하는지 유리에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을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실험을 통하여 얻어진 객관적인 지식은 고도의 제품을 만드는 데에도 쓰여 진다고 했다. 필자가 그곳에 가 보기 전에는 코닝 회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그릇만 제조하는 회사로 알았는데, 실제로 우주선제작에 사용하는 유리제품이나 잠수함제조에 사용되는 특수 유리제품도 전시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특별히 아주 인상적인 것은 넓이가 몇m나 되는 두꺼운 유리가 있었는데, 그 유리는 특수처리가 되어서 아주 투명하였고, 대조적으로 특수처리를 하지 않은 유리도 함께 전시를 해 놓았는데, 그 유리는 너무나도 불투명하였다. 어떻게 이런 특수유리의 제조가 가능하겠는가? 바로 그 비결은 반복되는 실험과 객관적인 관찰 그리고 거기에서 증명된 지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경험과 객관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방법론이 활용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이런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가지고 인간의 삶과 세상을 관찰하고 살아가게 되면서 이 과학적 객관주의는 결과적으로 현대인의 믿음의 문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2) 무엇보다도 이 과학적 객관주의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현상의 세계나 경험을 넘어선 초월에 대한 체험을 갖게 하는데 상당한 장애를 가져왔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 발견할 수 있고, 측량할 수 있는 것만을 참된 것으로 확증할 수 있다는 현대 과학은 인간의 유한한 영역을 전적으로 능가하는 실재(實在) 곧 초월의 차원을 인간의 지적 기반 위에서 경험하거나 확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사회 문화적인 환경속에서 인격적인 신으로서의 하나님의 초월은 많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개념으로나 경험으로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초월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초월성의 상실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또 하나의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성’(interiority)의 상실이다. ‘내면성의 상실’이란 인간의 깊은 내면의 세계와의 접촉을 잃어 버렸음을 말한다. 이 깊은 내면의 세계와의 접촉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 말은 우리 삶의 중심(center)이나 우리 자신의 중심(center)과의 접촉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나 깨달음이 없이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만이 전부 인 것처럼 그것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통전시킬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삶의 중심(center)을 잃어버린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활 양태는 그저 피상적으로 요란하게 (hustle and bustle) 사는 것이 그 특징이다. 깊이 있고 창조적인 침묵은 배제된 채 이 세계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놀이터와 같은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카니발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성의 문제는 바로 이 초월의 세계(초월의 하나님)를 잃어버리고, 그 결과 내면성까지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초월의 세계(lost world)를 되찾고 그 초월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데 있다. 즉 어떻게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본 영성이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그 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다(open to the presence of God). 그래서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생명과 의미와 방향성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초월의 하나님을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채워지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기도”로 가능하다. 기도는 초월의 하나님께 우리를 연결시키고 그 분께 우리 자신을 개방시킬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일차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요 하나님과 만남의 일차적인 통로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참여(마 25:) 역시 초월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체험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참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이와 더불어 "기도"가 반드시 필요(essential)하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오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져 살아가는 영적 삶에 있어서 기도가 기본적으로 필요(fundamental)한가? 우리가 예배를 드리거나 성례전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 찬양하는 것 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radical principle)은 하나님을 실질적이고 체험적으로 만나, 그 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변화(radical transformation)되는데 있다. 문제는 언제 우리에게서 이러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변화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내면화 시키는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내면화 시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떤 경험을 반복하여 반추함으로, 그 경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더 나아가 반추를 통한 깨달음이 하나의 의식구조로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의식이 내면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말은 바로 의식의 변화나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필자가 뉴욕주 로체스터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해마다 개설되는 “오토셜츠" 영성 강좌에서 죤 유데스 뱀버거라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장이 중세의 성 버나드 탄생 900주기 기념 강연을 했다.3) 이 분은 그 강연에서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영성을 개발시켜나가는가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수도사들은 하루에 일곱 번을 모여서 예배를 드리거나 공동 기도회를 갖는다. 매일 규칙적인 개인 독서와 공동 학습시간이 있다. 침묵 가운데 공동식사를 하고 함께 일을 한다. 수도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수도원의 이러한 환경이 영성 계발을 위해 얼마나 좋아 보이는가? 그런데 뱀버거는 수도원의 예배와 공동기도(주로 시편기도와 중보기도를 드린다)가 영성계발을 위해 도움이 되고, 좋은 체험들이 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온전한 변화와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수도자 개개인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면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또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스스로 개발하는 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이나 독특한 경험을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4)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나 영적 체험을 내면화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깊은 기도요 묵상이요 관상이며 또한 영적체험에 대한 반추이다. 20세기의 대표적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은 관상과 기도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는데, 이 머튼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뛰어난 해석자로 평가를 받으면서, 머튼의 ‘관상’에 대한 많은 연구물을 출판한 윌리엄 샤논은 머튼의 기도(관상)를 “내면성을 향한 여정”(Prayer: The Journey Toward Interiority)으로 제시한다.5) 내면화를 이루는 관상에 대하여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상은 초월적이며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아는 데에까 지 뻗어 나갑니다. ... 관상은 ... 모든 [의존적인] 실재 안에서
[절대적인 또는 어떤 것이나 존재에 의존적이지 않은] 실재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주는 은총입니다. 관상은 한정된 우리 존재의 뿌리에서
무한한 존재를 생생하게 깨닫는 것(vivid awareness of infinite
Being at the roots of our own limited being)입니다.6)
관상은 진통제가 아닙니다. ... 그것은 우상을 완전히 파괴하고 불사 름 으로 [우리 내면의]성소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우상도 하나님께서 비워 놓으라고 하신 곳, 중심(the center), 실존적 제단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입니다.7)

우리는 이 내면의 성소에서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친밀한 것 보다 더 우리에게 친밀하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다른 모든 영적 삶의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 없이는 결코 완전한 변화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앞서 인용한 머튼의 글에서도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기도의 본질에 대한 이해

이 글의 목적은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도”의 본질을 성서에 나타난 야곱의 기도를 중심으로 탐구하는데 있다. 왜 많은 성서의 기도 가운데서 야곱의 기도를 택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야곱의 기도 속에서 “관계”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야곱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과 야곱과의 관계, 야곱과 야곱 자신과의 관계, 야곱과 야곱의 과거와의 관계, 야곱과 야곱의 미래와의 관계, 야곱과 야곱의 사명과의 관계, 야곱과 야곱 자신의 죄책감이나 두려움, 야곱과 야곱의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필자는 야곱의 기도를 연구하면서 야곱의 하나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야곱의 삶의 전 영역과의 관계가 이 기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기도는 오래 전 성서속의 한 인물만의 기도가 아니라, 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를 반영하는 기도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성서적 기도의 오묘하고 깊은 본질을 보여 주는 좋은 모델(model)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제 구체적으로 야곱(Jacob)의 기도를 통해 나타난 기도의 본질을 살피고자 한다.

A. 기도 - 하나님과의 만남 (Wrestling with God)
첫째로, 야곱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는 기도의 첫 번째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통로가 된다. 이하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 창세기 32장 24절에서 야곱은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했다고 말한다. 호세아 12장 4절에서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486장 3절에서도 “옛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다.8) 그러나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기록하는 본문의 30절에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은 야곱이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만났다는 고백이다. 본문 28절에서도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밤을 새워 씨름을 했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표현들이 성경에 나타나지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9) 뒤에 가서 밝히겠지만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을 어떤 사람과의 씨름으로도 표현함으로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본질을 살피고 이해하는데 놀라운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10)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 이해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은 기도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하게 제시한다. 첫째로,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밤"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의 본질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야곱의 기도는 밤에 드려졌다. 또한 성서의 많은 기도들이 밤에 드려진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도 밤에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9장의 변화산과 22장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도 밤을 배경으로 한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9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을 새워가며 기도 하셨는데, 이 본문은 "기도가 밤에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3가지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는 밤의 기도와 오전의 공동체 형성-12제자를 부르심, 그리고 오후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일은 예수님의 하루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즉 본문은 예수님의 세 가지 표준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밤, 오전, 오후가 하루를 만들 듯이 기도, 공동체 설립, 사역이 예수님의 전 삶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적으로 제일 앞서고 있는 기도는 바로 "밤'의 사건이다. 창 28:11은 야곱이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 밤을 지내기 위해 멈추었다 왜냐하면 해가 져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대하여 유태교 신학과 문학을 연구하는 프리츠(Maureena Friz)는 이 본문에 나타난 뉘앙스를 ‘해가 졌는데 그 해가 갑자기 져버렸다’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밤이 갑자기 야곱을 덮쳐 버렸다’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가 졌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밤 또는 하나님이 밤을 통해서 야곱을 만나기 위해 찾아 왔음을 암시하고 있다.11) 구약학자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도 야곱이 하나님과 만난 사건이 밤에 이루어진 것을 주목하면서, 이 만남이 완전히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어서 하나님과 자신의 만남을 주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이 밤은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시고 그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영성가들이 ‘밤’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밤은 인간의 영적 여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본문에서도 야곱의 여정을 밤의 여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델에서 해가 떨어 졌는데(창 28:11) 다시 그 해가 떴다는 표현은 얍복강에서의 기도 체험이후로서(창 32:31)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야 동쪽에서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야곱의 인생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는 뜨고 졌을 것이다. 벧엘에서 졌던 해가 20년이 지난 후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다시 떠올랐다는 이 표현은 야곱의 여정, 즉 우리 인간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즉 야곱의 20년 세월을 밤의 여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영적 여정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의 인생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어두운 밤과 같이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으로는 100% 분명하지 않은 불확실한 삶의 연속이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 여정을 깊이 인식했던, 중세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 인생의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어둠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다시 어둠으로’, 어둠으로만 계속 이어지는 ‘어두운 밤의 여정’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전혀 앞을 내다 볼 수가 없고, 오직 믿음의 빛으로만 앞을 보며 나아가야 하는 어두운 밤의 여정이라는 의미이다.13)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아브라함의 여정도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지만 떠났다(히 11:8)”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여정도 결국 밤의 여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journey to unknown).
두 번째로 성경이나 영성고전에서 밤의 이미지는 기도의 핵심적인 본질을 말해 주는데 “밤 즉 어두움”이 “기도의 대상”을 의미한다. 밤은 우리의 눈으로는 분명히 볼 수 없다. 이 밤을 어두움(darkness) 또는 신비(mystery)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서 밤이나 어둠이 (또는 신비) 기도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도는 우리가 100% 확실하게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와의 만남이기 때문이다(Our encounter with mystery).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기도의 초청은 우리가 앞에 놓고 보고, 분석해서 완전히 파악하는 어떤 대상과의 만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는 다 알지 못하는 분과의 대면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대상(object)으로 보여주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신비로 남아있다고 역설한다.14)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Wholly Other)로 표현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은 모습을 갖지 않은 분, 또는 한 마디로 표현될 수 없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바로 이 절대적인 신비(mystery)로서의 이미지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말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수천 년을 연구 해왔고 그분에 대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부분이 훨씬 클 것이다.
기도가 바로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와의 만남”임을 성서본문은 또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던, 야곱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이 질문을 받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을 축복한지라(29절).” 이 성서의 말씀은 야곱의 기도의 일차적인 목적이 계시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기도하는 자가 기도를 통해서 전혀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야곱도 이 얍복강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깨달았으며, 영적으로도 많은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primary goal)는 계시와 같은 지성적 측면에 있지 않고 오히려 씨름(Wrestling), 즉 친밀함(intimacy)과 사랑(love)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와스코(Arthur Waskow)라고 하는 유태인 신학자는 유태인의 문학에서 씨름(wrestling)은 “half an inch away from making love”(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로 표현된다고 말한다.15) 그러므로 씨름16) 이라고 표현한 성서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아주 친밀하고, 깊은 영교, 즉 영적 친밀감(intimacy)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여성으로서 깊은 기도의 체험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 여정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는 스페인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가 진보하기 위하여 중요한 일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17) 기도는 많이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많이 하는 자가 기도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레사도 기도의 핵심은 기도 속에서 기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기도자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교제이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누가복음 3:21-23)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도 자신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 기도자들도 자신의 기도 속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관상가로서 자신의 기도를 통해 체험하고 깨달은 관상의 열매를 일반인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상가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당신이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 안에 임재하시고 (present in you), 당신 안에 사시고(lives in you), 당신 안에 거하 시며(dwells in you), 당신을 부르시며, 당신을 구원하시고, 당신에게 어느 책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어떤 설교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해 와 통찰을 제공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8)

여기서 머튼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임재와 역사하심을 증거하며, 우리가 기도 속에서 이 사랑과 임재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자신의 기도문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면서 “Heart speaks to Hearts”이라는 제목을 붙였다.19) 자신의 기도가 자신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가슴으로 드려진 것이라는 고백이다. 여기서도 기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20) 으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의 기도에 나타난 첫 번째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으로서의 기도, 즉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B. 기도 - 삶의 현실과의 만남(Wrestling with Esau)

야곱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는 기도의 두 번째 본질은 “기도는 삶의 현실(reality)과의 만남”이다. 기도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말을 할 때, 일반적으로 널리 만연되어 있는 한 가지 이해가 있다. 기도는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을 바꾸고, 인간의 힘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를 해결해 준다는 확신이다. 이번 여름(2003년)에 교황은 유럽이 무더위와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유럽에 비가 오기를 위해서 전 세계의 교회가 기도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하여 환경이 변화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어떤 면에서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직면하고 그 현실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있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절박한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만남이라고 하는 말은 직면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현실(Reality)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기도는 환상(illusions)에서 떠나 현실(reality)을 진지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야곱의 기도를 통하여 “현실과 만나는 기도”의 본질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는 야곱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무엇이었겠는가? 그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형 에서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 곧 화해의 문제였을 것이다. 야곱은 지금 자기의 생명과 가족이 에서로부터 위협을 받고, 자신의 모든 소유가 다 파멸될 위기의 기로에 선 것을 깨닫고, 얍복 나루터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여기서 ‘에서’라고 하는 존재는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위기의 현실을 상징하는 말이다. 야곱은 지금 이 당면한 위기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다. 바로 이 얍복강가의 기도는 야곱이 형 에서에게로 돌아오기로 작심했기 때문에 생겨난 상황이다. 야곱이 그저 하란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얍복강의 기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서로 상징되는 “현실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성경본문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본문 29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만 씨름(wrestling)을 한 것이 아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 얍복 나루터에서 인간 누구와 씨름을 했겠는가?21) 야곱은 형에서, 그리고 그와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밤을 새워가며 씨름을 했다.22) 야곱이 기도를 마치고 얍복을 건너서 형 에서를 만나게 되었을 때, 야곱이 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과 같사오며...”(창33:10) 이 야곱의 말에 대하여 유태인 신학자 와스코(Waskow)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만약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았다면 야곱과 씨름한 하나님의 얼굴은, 에서의 얼굴과 같았을 것이다”라고 한다.23)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과 에서의 얼굴이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 속에서 에서와 씨름하는 다시 말하면 에서와 싸움하는 감정을 결코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야곱은 밤을 새워가며 형 에서와 싸웠다. 실제로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표현된 자신의 기도속에서 에서와의 문제를 가지고 밤새 씨름을 한 것이다.24)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번 싸움은 지금까지 자신의 싸움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 얍복에서의 싸움은 지금까지처럼 형 에서를 누르고 그를 정복하기 위한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형제의 싸움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현대가의 두 형제 MK와 MH의 소위 ‘왕자의 난’에서 보여준 그런 종류의 싸움이 아니다. 이 씨름은 야곱이 형 에서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또 형 에서의 야곱에 대한 미움을 정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또 자기가 형 에서에게 행한 모든 일과 잘못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범한 모든 잘못된 행위를 대면해야 하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직면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드는, 이 현실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의 시작은, 야곱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 바로 이 야곱의 기도는 “현실과의 만남으로서의 기도”의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리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그 것을 직면하는 순간이요 또 우리가 그 현실(reality)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돕는 역할을 한다.
헨리 나우엔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발돋움인 기도를 환상에서 기도로 향하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우엔은 우리의 기도가 심오한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제일 큰 장애물은 우리 가운데 깊이 스며들어 있는 영원성에 대한 환상이라고 지적한다.25) 인간이 환상에 사로 잡혀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나우엔은 기도를 “순간의 훈련”이라고 말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고 현재의 순간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그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이리 저리 밀리는 삶이 될 뿐이라고 역설한다.26)
토마스 머튼도 기도(관상)란 완전히 깨어 활동하며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는 삶 자체라고 정의한다.27) 완전히 깨어 활동한다는 것은 현재를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머튼은 우리가 기도에 틀이 잡혀서 습관적이 되어 기도가 기계적으로 전락하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28) 왜냐하면 기도가 기계적이 되었다는 것은 삶에서 유리되었고 자기만족에 빠졌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시편으로 드리는 기도에서 머튼은 시편으로 기도를 잘 바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시편 어느 부분의 의미를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29) 시편의 의미를 살고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시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토라이지만 시편만큼 인간의 희망과 갈망, 슬픔과 기쁨들을 진실하게 표현한 노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시편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머튼에 의하면 참되게 드려지는 기도는 나의 현실과 말씀의 현실이 만나는 데 있다.
본문 28절에서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서 “이기었다”는 말은 영어로 prevail 또는overcome으로 번역이 된다. 히브리 원어로는 ‘투칼’(기본형은 ‘야콜’)이라는 낱말이다. 이 낱말을 직역하면 “you have been able to” 또는 “you have coped”로서 "상황에(‥‥ 에)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30) 다시 말하면 하나님 또는 현실(reality)을 직면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려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씨름(wrestling)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그 것을 의미하고 있다. 평생을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 (또는 씨름 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삶의 현실과 만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야곱의 기도가 보여 주는 중요한 본질이다.

C. 기도 - 참 자아와의 만남(Wrestling with Jacob himself)

세 번째로 야곱의 기도가 보여주는 기도의 본질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이 야곱의 거룩한 싸움은 야곱 자신과 형 에서 만의 싸움이 아니다. 다시 본문 28절을 고찰해볼 때, 본문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사람”은 복수(men, 히브리어םי󰚄󰗺󰔣)이다. 이 말은, 야곱의 싸움이 형과의 싸움만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즉, 야곱은 또 다른 사람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31) 이 말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영혼의 모습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32장 27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정체성(identity)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너는 누구냐? 너는 네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도전이었다. 이것은 양심의 고발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야곱은 “야곱이니이다”(27절) 예, 저는 야곱입니다 라고 말했다. 야곱은 ‘속이는 자, 정직하지 않은(dishonest/crooked) 사람‘을 뜻한다. 결국 이제야 야곱은 드디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바로 이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름의 변화 즉, 자기(self)의 변화(transformation),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기도를 통해서 참 자기(true self)를 경험하고 참 자기를 지향하는 존재의 변화를 기도자가 추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성서안에서도 이런 예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사야 6장에서 성전에서 기도하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고백한다. 예레미아 1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예레미아도,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울 앞에선 예레미야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들이 보여주듯이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 분의 뜻과의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을 넘어서, 참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관상)에 있어서 참 자기 발견의 중요함을 깨달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내게 있어서 성인이 되는 길은, 나 자신이 되는 것으로 나의 거룩이나, 나의 구원의 문제는 곧 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참된 나를 찾느냐 못 찾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역설한다.32) 머튼은 기도에 있어서 이 자기 발견(the discovery of true self)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든다.

나무는 나무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 나무가 나무다워 질 수록 그 나무는 그만큼 더 하나님을 닮게 된다. 나무가 자기에게 의도된 것 이외의 어떤 것이 되려고 한다면 나무는 덜 하나님을 닮게 되고 하나님께도 덜 영광을 돌리게 된다. 창조된 것으로써 똑같은 것 은 없다 어떤 두 개의 나무도 서로 같지는 않다 그들의 개체성은 불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창조된 것 하나 하나의 완전성은 어떤 추상적 형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조물의 완전은 자체로서의 개체적 주체성에 있다. 이 특정한 나무는 이전에도 이 후 에도 그 어떤 나무도 하지 못할 모양으로 땅속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 고 하늘에 가지를 뻗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33) 살아서 자라고 있는 것들의 모양과 성격, 무생물, 동물과 꽃, 그리 고 모든 자연의 모양과 성격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거룩하다.34)

참된 자기의 발견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자기의 모습이 참 자기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머튼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외적 자아와 보다 깊고 진실한 내적 자아를 분명하게 구별한다.

우리 모두는 가공의 인격, 즉 거짓자아로 가려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모르시기 때문 입 니다.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사적이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거짓되고 사적인 자아는 하나님의 의지 와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고 싶어 합니다. 즉 현실과 생명의 밖 에 그런 자아는 환영일 수밖에 없습니다. ... 모든 죄는 나의 거짓 자 아, 자기중심적 욕망에만 존재하는 자아가 생명의 근본적 실체라는 가 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생명의 이 근본적 실체를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35)
지상에서의 유일한 진실된 기쁨은 거짓된 우리 자아라는 감옥으로부 터 의 탈출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본질과 우리 영혼의 심연에
기꺼이 거처하시는 생명과 사랑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36)

기도에 있어서 참 자아의 발견을 강조하는 머튼은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뿐만이 아니 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참 된 존재를 발견하게 하고 완성시킨다.37)

결국 머튼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참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과 참된 자기를 추구하는 삶에는 결코 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나(Self)라고 하는 존재가 참으로 신비(mystery)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이듯이, 나의 존재나 나의 내면의 세계도, 하나님의 신비만큼이나, 신비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기도를 살펴볼 때, “참 자기와의 만남으로서의 기도”는 일평생 계속되어야 한다.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로서 참 자기와의 만남을 제시하고 있다.


D. 기도 - 새로운 사명과의 만남(From Jacob to Israel)

마지막으로, 네 번째,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로서 “새로운 사명과의 만남”을 말해주고 있다. 본문 28절에서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 말은 야곱에게 새로운 사명(new mission)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명(mission)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야곱에게 있어서 어떻게 사명(new mission)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창28장에서 하란으로 도망을 가던 야곱은 벧엘에서 꿈에 사닥다리 환상을 보았다. 이 꿈속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28:13-14) “나는 여호와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야곱에게 이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은 이스라엘의 건설에 있다. 이스라엘민족이 땅에 편만하며 이스라엘에 의해 하나님의 복이 세상 모든 족속에게 퍼질 것이라는 말이다.38)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을 들은 야곱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28:20-22).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나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13-14절의 하나님의 약속과 창세기 28: 20-22절의 야곱의 응답의 차이를 살펴보면, 창 28장 20절에서 야곱은 조건절을 사용하고 있다(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watch over me on this journey... New International Version). 20절-21a절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되풀이 하지만 ‘땅과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되어 온 땅에 편만하게 되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 자손을 인해 복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생략한다(28:12-14절 내용). 오히려 이 서원기도에서는 ‘자신의 복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가 있다(20절에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덧붙이고 있다). 15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이 살짝 바뀌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 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내가 ... 돌아가게 하시오면”으로 바뀌고 있다. 15절에서 “이 땅으로”가 “(나의) 아비 집”으로 바뀌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야곱은 자기의 삶을 본인이 주도하기를 원하고 있고 또한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땅(the land)보다는 자기 가족의 집에 관심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39)
그런데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었던 원래의 비전(original vision)과 소명(vocation)에 대한 확인(confirmation)이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 즉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건설하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백성에게 복을 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야곱의 여정과 특별히 그의 기도를 살펴볼 때, 야곱의 기도는 야곱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명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앞서 가신 신앙의 선배들도 바로 이 기도를 통해 사명(mission)을 확인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을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비전,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이루어 가는 모든 헌신의 삶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야곱의 기도가 보여주는 기도의 본질 가운데 네 번째는 바로 “사명과의 만남”이다.
우리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씨름하는 이 야곱의 기도를 살펴볼 때, 마지막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유대인들의 독특한 관점이 있다. 유대인의 신학자 쿠스너(Lawrence Kushner )에 의하면, 유대인의 대표적인 성서해석 전통중의 하나인 미드라쉬(Midrash)전통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 야곱이 돌 베게를 배고 잠을 자다 사닥다리의 환상을 본 벧엘,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한 이 얍복강가가 다 같은 한 장소로 언급된다.40) 영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후에 성전(Temple Mount)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을 돕기 위해 창 28장을 보면, 야곱이 꿈에 사닥다리를 보고 깨어난 후에, 야곱이 한 첫 말이 바로 “두렵도다 이곳이여”(How awesome is this place!)이다. 그런데 이 awesome(두렵도다)이 히브리어로 “norah”인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 “Moriah”와 비슷하다. 실제로 “모리아”는 awesom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미드라쉬전통에 비추어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모리아, 벧엘, 얍복은 바로 신앙의 경이로움(religious awe, 하나님의 경이로움, 하나님의 영광)이 땅으로 흘러 들어오는 장소이다. 바로 이 장소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결국 이 모든 장소는 (모리야, 베델, 얍복, 성전)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인식되는 자리요.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게 되는 자리이다. 그래서 Midrash전통은 모리야, 벧엘, 얍복강, 성전을 한 장소로 보고 있다.
이 글이 현재는 얍복강의 기도에 초점(focus)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Midrash전통의 해석을 빌린다면, 기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경이로움(awe),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순간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이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경험하는 순간이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가 하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미드라쉬(Midrash)전통의 해석에서 모리아와 벧엘, 얍복, 성전을 하나로 본다고 하는 점에서 각각의 장소와 시간의 구별이 사라지고 있다. 미드라쉬전통의 해석과 그들의 영적 체험을 기도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 본다면, 이 전통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속에서 서로 서로의 연결(connection)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국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믿음의 사람들을 연결시켜 준다. 더 나아가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계를 확인시켜주고, 하나로 묶어주는, 그래서 이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놀라운 은혜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합 (integration)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원래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를 믿고 자기를 의지(self-reliant, self-sufficient)하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야곱은 자기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모형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다. 이것은 야곱의 연약성(vulnerability) 즉 야곱이 약해 졌음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야곱처럼 우리의 연약함(limitation)을 안고[절뚝거림(Limping)은 아픔이나 연약함을 상징한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성을 깨닫는데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encounter)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야곱은 이 연약함의 마크(mark-부러진 환도뼈/ 평생 저는 걸음)를 평생 지니고 살게 된다. 자신의 연약함을 안고, 이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과 그분의 사랑과 인도를 간구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야곱의 기도요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의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이나 한계(limitation)를 안고 씨름한다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야곱이 형을 만나기 위해 돌아온다는 것, 그것은 야곱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연약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래서 바울이 담대히 고백한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환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절)
비록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는 약함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이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과 이 세상(reality), 우리 자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신앙의 역설이다. 여기에 기도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절뚝거리는 모습, 약자의 모습으로, 기도의 자리를 떠나게 된다. 더 이상 강자가 아닌, 약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절름발이의 걸음일 지라도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 (아침 해)을 향해 걸어가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아침 해는 우리를 우리의 삶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wake-up call)이다. 우리가 비록 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설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소망을 품고 힘차게 앞을 향해 걸어 나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 네 가지를 제시한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 복판에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창 28장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여기서 오르락이 내리락보다 먼저 표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현이다).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우리의 이웃의 존재의 근원이심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도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명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나와 나 자신, 나와 현실과 우리의 이웃, 나와 우리의 사명을 하나로 묶어 놓는다. 이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가?
이상을 통해 기도와 영성의 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기도가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이 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1) 미상, 다음의 글에서 인용, [정철범, “멀티미디어 시대와 기독교의 멀티 딜레마,” 기독교 사상. (1996년 2월호), 2.]
2) C.f. Nelson S.T. Thayer, Spirituality and Pastoral Care.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85). pp. 15-30.
3) John Eudes Bamberger, “St. Bernard of Clairvaux: The Legacy of His Spiritual Theology,” 성 버나드 신학대학원 오토셜츠 영성강좌, (Rochester, NY: St. Bernard's Institute, 1990).
4) 헨리 나우엔의 글에서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 자신 안에 깊이 내재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스스로의 믿음의 여정을 걷는 신앙의 내면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Henri J. M. Nouwen, The Three Movements of the Spiritual Life: Reaching Out (New York: Doubleday, 1975) 13-14.
5) William Shannon, 'Something of a REBEL': Thomas Merton, His Life and Works: An Introduction, (Cincinnati, OH: St. Anthony Messenger Press, 1997). pp. 72-81.
6)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orfolk, CT: New Directions, 1962). pp. 2-3. [ ]안의 내용은 필자에 의해 첨가됨.
7) Ibid, p. 13.
8) 작사 미상, 찬송가 (서울: 한국교회 찬송가 출판사, 1988). p. 486
9) Walter Brueggermann, 창세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p. 400; John Calvin, 구약성경주해 2: 창세기, (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82). pp. 244-246.
10) 여러 구약학자들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본문을 구성하는데 재료로 여겨지는 민담에 주목한다. 민담에 대한 이해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 Gerhard von, Rad, 창세기, (서울: 한국 신학연구소, 1981). pp. 357-361; 강성열, 현대인을 위한 창세기강해,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p. 260; 성서와 함께 편집부, 보시니 참 좋았다: 성서 가족을 위한 창세기 해설서, (서울: 성서와 함께사, 1987). pp. 293-294]. 성서신학자들의 그러한 접근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만일 성서기자가 민담들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져와서 사용하는 성서기자의 관점(신학)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사실이다. 이 민담을 사용하는 성서기자의 관심은 야곱의 기도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신학적 진실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서기자가 당시에 유용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본문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경전으로서의 성서연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탠 월터스의 본문연구에 대한 글이나 여러 유대인 신학자의 글에서 본문에 대한(물론 그들이 성서해석의 방법론에 대하여 여기서 기술하고는 있지는 않지만) 이런 접근을 발견 할 수 있었다. [Stanley D. Walters, Travels of a Trickster: The Jacob Cycle: Genesis 25:19-35:29, (Courtice, Ont: Manthano Press, 1990)].
11) Maureena Friz, “Lives of Transformation: The Book of Genesis." (Toronto: Toronto School of Theology) 예루살렘에서 유태교 문학과 신학을 연구하는 Friz교수가 1997년 여름학기에 Toronto School of Theology에서의 강의에서 인용함.
12) Walter Brueggermann, 창세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p. 365.
13) St. John of the Cross, “The Dark Night,” The Collected Work St. John Of the Cross, trans. by Kieran Kavanaugh and Otilio Rodriguez. (Washington, D. C. (Institute of Carmelite Studies, 1979). pp.295-296. 이 “어둔 밤”이라는 시를 주해하는 형식으로 십자가의 요한은 깔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라는 두 권의 영성 고전을 저술하였다; 어둔 밤, 최민순역(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3). “어둔 밤”이라는 위의 시는 이 책의 2-3면에 있다. 깔멜의 산길, 최민순역(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8).
1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The Doctrine of God II. I, (Edinburgh: T. & T. Clark, 1957).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13면 이후와 206면 이후;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히 파악하여 알 수 없는 분이시며 표현 할 수 없는 분이심에 대해서는 186면 이 후를 참고하라.
15) Arthur Waskow, Godwrestling-Round 2: Ancient Wisdom, Future Paths. (Woodstock, VT: Jewish Lights Publishing, 1996). p. 27.
16) 아비바 존버그(Aviva Gottlieb Zornberg)는 라쉬(Rashi)가 묘사하는 유태인의 씨름(va-ye`avk[“wrestled])을 요약한다. 존버그에 의하면, 라쉬는 씨름에서 두 사람이 서로 뒤엉켜서 마치 둘이 하나로 묶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강조한다. 씨름의 방식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끌어안고 힘을 쓰면서 상대방을 땅에 넘어뜨리는 것이다. 이렇듯 씨름은 전신의 가장 가까운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문자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확실히 열정적인 경험이다. 라쉬는 기도를 씨름으로 표현한 것은 기도가 얼마나 친밀한 하나님과의 영적 경험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Avivah Gottlieb, Zornberg, The Beginning of Desire: Reflections on Genesis, (New York: Image Books, 1996). p. 234.
17) 예수의 테레사, 영혼의 성, 최민순역(서울: 바오로딸, 2002). 제 4궁방 1장 7번. pp. 77-78.
18) Thomas Merton, The Hidden Ground of Love, Selected and edited by William H. Shanno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85). p. 158.
19) Henri J.M. Nouwen, Heart Speaks to Heart. (Notre Dame, IN: Ave Maria Press, 1989)
20)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영성가들의 글에서 마음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인간의 중심이나 핵심을 상징한다. 마음은 단지 인간의 정서(affectivity)의 자리 일뿐만이 아니라 자유(freedom)와 의식(consciousness)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마음에서 우리 자신들과 인간 존재 또는 하나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도 한다. 특별히 성서와 교부들의 글에서 마음은 전 존재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 구약과 신약성서에서의 마음은 우리의 사고나 느낌, 그리고 결정의 중심을 나타낸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의 기능은 사고와 반추하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의지작용과 양심의 작용까지도 나타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사고와 반추뿐만이 아니라 결정과 순종, 헌신과 의도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마음이 바로 전체적인 인간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Annice Callahan, "Heart,"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edited by Michael Downey, (Collegeville, MN: The Liturgical Press, 1993), pp.468-469.
21) 스탠 월터스(Stanley D. Walters)는 여기 야곱이 씨름한 “사람”은 야곱이 생애에 걸쳐 씨름했던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Stanley D. Walters, Travels of a Trickster: The Jacob Cycle: Genesis 25:19-35:29, (Courtice, Ont: Manthano Press, 1990). p. 11. 필자는 월터스의 주장과 와스코의 견해(야곱과 씨름한 사람이 “에서”라고 주장)가 서로 상반되는 견해라고 보지 않는다. 서로 모순이 되기보다는, 와스코에게 있어서는 야곱에게 있어서 에서의 문제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가를 부각시키고 있다고 본다.
22) Arthur Waskow, Godwrestling-Round 2: Ancient Wisdom, Future Paths. pp. 25-26.
23) Arthur Waskow, Godwrestling-Round 2: Ancient Wisdom, Future Paths. p. 25.
24) 월터스에 의하면 더 광범위한 야곱이야기의 틀로 볼 때, 야곱의 하나님과의 씨름과 사람들과의 씨름은 하나의 사건으로 엮어져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돕기 위해 스탠 월터스는 다음의 본문을 서로 대조한다. 1) 32장 11절에서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2) 32장 30절에서 야곱이 자신이 씨름했던 장소를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이름을 짓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고 말하였다. 또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33장 10절)라고 말한다. Stanley D. Walters, Travels of a Trickster: The Jacob Cycle: Genesis 25:19-35:29, p. 11.
25) Henri Nouwen, Reaching Out. p. 116.
26) Henri Nouwen,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서울: 은성, 1995). pp. 20-21.
27)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p. 2.
28) Thomas Merton, The Climate of Monastic Prayer. (Spencer: Cistercian Publications, 1969). p. 20.
29) 토마스 머튼, 가장 완전한 기도: 시편으로 바치는 기도. (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 1986) 36.
30) Arthur Waskow, Godwrestling-Round 2: Ancient Wisdom, Future Paths. p. 25.
31) Arthur Waskow, Godwrestling-Round 2: Ancient Wisdom, Future Paths. p. 26; Stanley D. Walters, Travels of a Trickster: The Jacob Cycle: Genesis 25:19-35:29, p. 11.
32) Thomas Merton, Seeds of Contemplation. (Norfolk, CT: New Directions, 1949) 26.
33) Merton, Seeds of Contemplation. 24.
34) Merton, Seeds of Contemplation. 25.
35) Merton, Seeds of Contemplation. 28.
36) Merton, Seeds of Contemplation. 22.
37) Thomas Merton, "Preface to a Collection of Prayers," in Thomas Merton: Essential Writings. Selected with an Introduction by Christine M. Bochen. Modern Spiritual Masters Series. (Maryknoll, NY: Orbis Books, 2000). p. 82.
38) Claus Westermann, 창세기주석, (서울: 한들, 1998). p. 291; Walter Brueggermann, 창세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p. 368.
39) Stanley D. Walters, Travels of a Trickster: The Jacob Cycle: Genesis 25:19-35:29, p. 8.
40) Lawrence Kushner, God was in this Place & I, I did not Know: Finding Self, Spiritually and Ultimate Meaning. (Woodstock, VT: Jewish Lights Publishing, 1991). pp. 158-160.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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