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0/04/2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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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무엇이 기도를 막는가? (이강학)
 
 

무엇이 기도를 막는가?



* <빛과 소금> 2009년 11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경험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도가 막혔다는 표현은 기도는 소통의 도구라는 이해를 배경에 깔고 있다. 기도가 막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가 막히면 우리 마음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우선, 답답해진다. 답답해지는 이유는 이 전의 경험이 현재의 경험을 평가하는 일종의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전에 했던 “통하는 경험”이 생각나고 그 경험을 다시 갈구하게 된다. 기도가 막히는 경험은 기도가 통했던 경험을 전제로 한다. “통하는 기도”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기도가 막히는 경험이 무엇인 줄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가 막히는 경험은 기도의 초보자가 할 말은 아니다. 이미 기도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의 경험이고, 통하는 기도를 맛본 사람의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막히는 경험”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또한 기도가 막힌 데서 오는 답답함의 정도는 하나님을 향한 영성적 열망(desire)에 비례한다. 답답함이 크다는 것은 기도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22:2). 그러므로, 답답한 느낌 그 자체만가지고 실의에 빠질 일은 아니다.

기도가 막히면 먼저 내가 기도를 통해 정말 경험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다음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왜 기도를 하려고 했는가? 내가 기도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 그 자체가 목적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였는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가 중간에 기도의 목적이 변질된 것은 아닌가?’ 사막의 성자 안토니를 매년 방문하는 세 명의 교부들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의 교부들은 영성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안토니를 통해 그들이 얻게 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교부는 항상 침묵했다. 오랜 후에 안토니가 그 세 번째 교부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까?” 마침내 그 교부가 대답하였다. “아버지여, 저는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교부에게는 하나님의 사람 안토니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안토니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영성에서 흔히 기도의 방법으로 소개되는 ‘관상’이란 원래 기도의 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사실 이런 태도를 말한다.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관상적 태도는 세상의 유혹과 나의 욕망을 뒤로 하고 오직 주님만 몰두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나에게 기도시간은 어떤 의미였는가? 잠잠히 앉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맛보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외에 무엇을 더 기대하고 무엇을 더 원하고 있었던가?’ 아마도 기도가 막혔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아야 할 질문인 것 같다.

기도가 막혔다고 느껴질 때 둘째로 스스로에게 해봐야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기도의 경험을 통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 전에 기도하면서 경험했던 것 - 통하는 기도 - 이 정말 하나님과의 소통이었다는 확신이 드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기도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고 깊은 평화를 맛본다. 나 자신에 대한 앎이 생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 생긴다.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갖기도 한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생긴다. 부드럽고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된다. 방언을 하게 되기도 하고, 병이 낫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떤 성경구절이 떠올라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어떤 음성을 듣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를 보기도 한다. 중요한 의미를 담은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외에도 더 많은 경험들이 있겠지만, 이런 경험들이 대체로 ‘하나님을 만났다’ 또는 ‘기도가 잘 되었다’는 반응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이다. 기도하는 모든 순간 이런 경험들을 계속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떤 때는 기도가 참 잘 되었다고 만족하는 날들이 이어지는가 하면, 다른 때는 기도시간에 별 경험이 없었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계속되기도 한다. 기도의 경험들을 반추해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내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그 경험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질문해보는 것이다. 경험들 중에는 내 삶과 인격을 예수님을 닮도록 변화시키지는 못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내 지적 욕구만을 잠시 충족시켜주는 경험들도 있고, 좋은 느낌들로 내 감정만을 잠시 만족시켜주는 경험들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가 막혔다고 기도자가 느끼는 것은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기도 경험에 지적 호기심 충족과 감정적 만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말일 수 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는 경험은 그동안 맛보았던 기도의 경험들을 돌아보고 그 경험들에 대한 내 평가의 기준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이전에 했던 기도의 경험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분명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는 확신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기도가 막혔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 좋은 기도의 경험을 계속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나에게서 찾을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다. 먼저, 나 자신이 기도를 막는 경우를 살펴보자. 첫째, “청결한 마음 (purity of heart)”을 상실했을 때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는 “청결한 마음”을 팔복 중 하나로 선언하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여기에서 마음은 거울과 같다. 마음이 청결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인다. 문자적으로 “청결한 마음”은 “나누이지 않은 마음”이다. 하나님만을 진정한 보물로 바라보는 마음이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 그래서, 세상의 재물보다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마음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영성가들은 평생 “청결한 마음” 갖기를 사모하고 노력하였다. 기독교 영성사에 나오는 모든 금욕적 방법들이 사실은 “청결한 마음”을 지향하는 노력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위해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 (346-399)라는 유명한 영성가는 여덟가지 악한 생각들 (탐식, 육욕, 탐욕, 낙담, 분노, 게으름, 허영, 교만) 그리고 영혼을 지배하는 충동들과 금욕적 방법들을 사용해서 싸워야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도가 막혔다고 느낄 때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어떤 정욕 때문에 마음이 나뉘어져있는지 또는 사로잡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나 스스로 기도를 막는 경우에 나의 불순종이 원인일 수 있다. 기도는 나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를 통해 기도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의 초대에 내가 순종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일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순종의 결정체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순종의 백미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그래서, 기도의 경험이 순종을 요청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면 잘못된 기도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영성생활이 순종을 훈련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면 잘못된 영성생활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기도는 막히게 된다.

다음으로, 기도가 막히는 경험이 기도자를 영적성장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때가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해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대화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통성기도 뿐만 아니라 침묵기도를 통해서, 성경묵상 뿐만 아니라 자연묵상을 통해서, 개인기도뿐만 아니라 공동기도를 통해서 등등. 기독교영성사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경험들을 자료로 제시해주고 있다. 묵상방법에 있어서도 감각과 상상력, 기억,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는 증언들이 많이 있다. 16세기 영성가인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영적성장이 진전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경험을 설명하기도 한다.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경험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묵상방법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세상적으로 길들여져 있던 감각은 나와 함께 무디어지거나 죽는다. 그래서, 이 전에 기도할 때 사용하던 나의 정신적 기능들이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 경험이 “어둔 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영혼의 어둔 밤”은 영적성장이 진전된 상태에서 경험하는 또 하나의 “기도의 막힘” 현상인 것이다. 이 때 기도자는 기도가 이전처럼 잘 되지 않는 것에 당황하기 쉽지만, 오히려 이 경험이 영적인 진보의 표징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오히려 희망을 품고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게 된다. 이 때부터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이 전에 좋았다고 느꼈던 기도의 경험들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가 막히는 경험은 영적 진보의 길로 가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일 수 있다. 잠시 당황스럽겠지만, 이 전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믿음과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며 나아가야할 때인 것이다.

기도가 막혔다고 느껴지는가? 잠시 멈춰 서서 나의 기도생활에 대해 돌아보고 성찰할 때이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했던 경험에 대한 나의 평가가 바른 것이었는지, 내가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영적 진보를 격려하시며 더욱 친밀한 만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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