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0/06/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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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
제 목
 조나단 에드워즈의 식별 (6월 세미나 )
 
 

영성나무 세미나: 2010. 6. 21. 이강학 박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식별

A.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구별하는 표지>(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이하, <구별하는 표지>)와 <종교적 정서론>(A Treatise of Religious Affections)의 배경

- <구별하는 표지>: 1741년 출판되었다. 부흥을 연구한 첫 출판물이다. 본래 1741년 9월 10일 조나단 에드워즈가 예일 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었다. 원제는 “최근에 이 땅의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에 나타난 특별한 일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구별하는 표지: 이 일에 수반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함”이다. 이 논문에서 에드워즈는 부흥을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서 지지한다. <구별하는 표지>는 경건을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있다는 사상과 긍정적인 표지들과 부정적인 표지들을 구별하는 것에 대해 소개한다. 1742년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서 최근에 일어난 종교 부흥에 관한 몇가지 생각들>(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이란 논문에서 존 다벤포트 같은 “경건한 열혈당”과 찰스 촌시 같은 “악마적인 반대자” 사이에서 견고한 자리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다벤포트의 감정주의와 촌시의 합리주의의 갈등으로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상황은 날카롭게 양극화되었다. <몇 가지 생각들>에서 에드워즈는 <구별하는 표지>에서 제안한 구별 원칙을 적용하고 부흥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부흥을 변증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 <종교적 정서론>: 에드워즈가 <몇가지 생각들>을 기록하는 동시에, 1742년부터 1743년 초까지 했던 일련의 설교문이다. 1743년 9월, 촌시는 <뉴잉글랜드의 종교 상태에 관한 적절한 생각들>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부흥이란 단순히 열심주의의 확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1743년 3월, 코네티컷 주의 뉴런던에서 다벤포트는 그가 받은 성령의 직접 영감을 따라 새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청교도 교부들의 책 일부를 포함하여 많은 논문들을 불살랐다. 1743년과 1746년 사이에, <종교적 정서론>이 출판될 때, 촌시의 반부흥 관점이 우세했고, “종교적인 것들”은 사라졌다. <종교적 정서론>에서 에드워즈는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적들의 전략을 언급하면서, 식별되지 않은 정서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했다.

B.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식별

1. 구조

-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요일4:1을 간략히 고찰한 후, 부흥의 반대파들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잘못 사건들을 판단하게 하는 아홉가지 “부정적인 표지들”을 열거한다. 이 표지들은 단순히 비본질적인 표현들로서 이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결론내릴 수 없다. 두 번째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진정한 역사라는 “확실하고, 구별되는 성경적 증거들” 다섯가지를 열거한다.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세가지 내용으로 결론을 내린다: 부흥은 “대체로,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옴”; 반대파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부흥의 옹호자들에 대한 충고.

2. 아홉가지 부정적인 표지

(1) “나타난 일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실히 결론지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무척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2) “사람의 몸에 나타난 효과, 즉 눈물, 떨림, 신음, 큰 외침, 몸의 고통, 기력이 쇠함 등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떤 규칙을 주지 않는다.
(3) “종교에 관한 대단한 야단법석과 소란이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4) “상상 안에서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5) “수단으로서 본보기(example)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표지가 되지는 않는다”
(6) “경솔한 행동과 부정한 행동을 많이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표지가 되지는 않는다”
(7) “판단에 실수가 있고 사탄의 미혹에 섞여있다고 그 일 전체가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악마의 미혹에 이끌릴 수도 있다: “진정한 성인들의 경우에, 은혜가 수많은 타락과 함께 거주하기도 하고,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동거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악마의 나라가 같은 마음에 잠시 동안 함께 머물 수 있다.
(8) “이루어진 일이 대단한 실수나 수치스러운 행위로 빠져버렸다고 해서, 그 일 전체가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위선이 있었다고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9) “그 일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주는 공포를 엄청난 비애감과 중대함을 가지고 강조하는 목회자에 의해 증진되었다는 것 같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3. 다섯가지 긍정적인 표지

(1)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의 구세주라는 경외감을 더욱 고양시키는 것: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로 이끌고,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갖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더 필요로 하고, 평소보다 더 그리스도에 대해 고상하고 경외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향해 정서가 더 기울어진다.
(2) 성령은 사탄의 나라의 관심, 즉 죄를 짓게 하고 세상적 욕망을 고무시키는 것에 반대로 작용한다. 성령은 사람들이 죄와 탐욕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의를 향하게 한다; 세상의 즐거움, 이익 그리고 명예에 대한 경외감이 줄어든다; 그것들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심히 사라진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도록 돕는다.
(3) 성령은 성경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을 진리와 거룩함 안에 세운다.
(4) 진리의 성령은 나타난 종교의 객관적 진리 위에 사람들의 마음을 세운다.
(5)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은 진실하고 거룩한 영의 영향이라는 최고의 증거이다. 성령은 영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하고 그분들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며 살게 한다. 그것은 외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게 하며, 다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갈망하게 한다. 에드원즈는 겸손한 사랑은 진실하고 거룩한 초자연적 사랑의 확실한 특징이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분명한 표시는 사랑과 겸손이다. 겸손과 사랑은 마귀의 영이 주는 교만과 악의와 완전히 반대된다.

4.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식별

-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식별은 인식적이고 정서적인 과정이다.
- 식별은 인식적인 과정이다: 이해를 얻고 관찰과 평가의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사건의 형태를 관찰하고 이것을 성경에 나온 기독교 신앙과 비교했다.
- 식별은 정서적인 과정이다: 식별자의 경험적 이해를 필요로 하며 식별의 대상은 정서적 경험 그 자체이다. 부흥에서 사람들은 정서적 경험에 사로잡혔다: 두려움, 기쁨, 눈물, 기쁨으로 뜀, 하나님께 삼키는 듯한 느낌, 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슬픔 등. 이 정서들이 일차적인 식별의 대상이었다. 에드워즈가 <구별하는 표지>에서 정서의 신학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감정”(emotions)의 의미로 정서를 사용하고 있으며, 정서는 식별할 내용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식별의 대상은 그룹차원의 정서-행동 경향 (the group affective-behavioral trend)이었다.

C. <종교적 정서론>에 나오는 식별

1. 구조

- <종교적 정서론>의 구조는 <구별하는 표지>와 비슷하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 “정서들의 본질과 종교에서 정서들의 중요성”에서,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를 정의하고 기독교에서 그들의 가치를 변호한다. 두 번째 부분, “종교적 정서가 진정한 은혜의 정서인지 아닌지에 대해 불확실한 표지들 보여주기”에서, 그는 <구별하는 표지>에 열거했던 아홉가지 부정적 표지를 열두가지 부정적 표지로 발전시킨다. 마지막 부분,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을 구별하는 표지들을 보여주기”에서, 그는 성령의 구원하는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영향들을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열두가지 긍정적인 표지들을 열거한다.

2. 정서의 본질과 중요성

- 정서성(affectivity)은 에드워즈의 식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별하는 표지>에서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보편적인 정서적 경향을 설명하고, 그런 정서적 경향을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는 원칙들을 세운다. <몇가지 생각들>에서 에드워즈는 좀 더 그 주제를 집중해서 다룬다. 존 스미스에 따르면, <몇가지 생각들>에서 에드워즈는 “영혼의 정서”(the affections of a soul)를 의지(the will)로부터 분리시키는 철학에 반대한다. 그리고, 존 로크의 감각주의적 심리학(sensationalist psychology)을 채용하여,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을 옹호한다: 인간은 통합적인 존재이다. 그 안에서 “모든 정서의 행위들은 어떤 의미로 의지의 행위들이다. 그리고 모든 의지의 행위들은 정서의 행위들이다.” 그는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인격적 존재의 역동적인 중심은 지성(intellect)에 있지 않고 의향(disposition)에 있다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종교적 정서론>에서 에드워즈는 이 정서성의 주제를 더욱 완전히 발전시킨다. <종교적 정서론>에서 에드워즈가 다루는 정서는 부흥의 상황에서 개인들이 경험하는 정서들을 말한다.
- <종교적 정서론>의 첫 번째 부분은 정서의 정의와 정서의 중요성을 다룬다. 에드워즈는 정서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활발하고 감지할 수 있게 발휘되는 것”(the vigorous and sensible exercises of the inclination and will of the soul)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두가지 뚜렷한 기능, 즉 이해력과 성향을 받았다. 이해력은 감각, 숙고, 식별, 관찰, 그리고 판단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성향은 영혼이 관찰하고 고려한 것들에 관하여 마음이 쏠리는 기능이다. 성향에 의해 영혼은 어떤 것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기뻐하거나 마워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 된다. 성향이 행동과 연결될 때, 그것을 의지라고 부른다. 성향이 발휘되는 것과 관련해서, 정신(mind)은 종종 “마음”(heart)이라고 불린다.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발휘되는 것은 그 종류와 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 성향이 더 활발하고 감지할 수 있게 발휘되는 것을 정서라고 부른다. 정서와 성향, 그리고 의지의 차이는 오직 “그 발휘되는 것의 생생함과 감지되는 정도”(the liveliness and sensibleness of exercise)의 차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정서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받아들이기와 좋아하기 또는 거부하기와 싫어하기. 앞의 것은 사랑, 갈망, 희망, 기쁨, 감사, 그리고 자기만족 등을 포함한다. 뒤의 것은 증오, 두려움, 분노, 그리고 슬픔 등을 포함한다.
- 다른 한편, 에드워즈는 정서와 정념(passion)의 차이를 강조한다: 정서는 “의지와 성향의 모든 활발하고 생생한 발휘”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정념은 “더 갑작스러운 것들, 그리고 동물적 영혼을 더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들, 정신을 제압해버리는 것들, 그 자신이 통제하기 힘들게 되는 것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존 스미스는 에드워즈의 이 차이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반대자들이 생각할 때, 에드워즈는 지성을 희생시키면서 종교적 정념을 변호한다. 그들은 에드워즈가 정서는 자아가 생각(idea), 즉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럴드 R. 맥더모트는 에드워즈의 정서에 대한 정의를 더 쉽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정서는 오래 지속되고, 강하며, 깊고, 믿음과 함께 가며, 항상 행동으로 귀결되고, 정신, 의지, 느낌을 수반하는 것이다.
- 정서의 중요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진정한 종교는, 대부분, 정서로 이루어져 있다”(true religion, in large part, consists in the affections)는 사실에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들의 의향이나 행동에 변화가 없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들은 것에 그들의 성향이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정한 종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로 정서들을 언급한다: 두려움, 희망, 사랑, 증오, 갈망, 기쁨, 슬픔, 감사, 동정심 그리고 열심. 그들 가운데 사랑은 “정서의 대장”(the chief of the affections)이고 “모든 다른 정서들의 원천”이다. 정서들은 또한 “행위들의 샘”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정서들을 구분하지 않고 거부하고 폐기하는 사람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가 없는 곳에 진정한 종교는 없다.”(there is no true religion where there is no religious affection.)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종교를 그들 자신의 마음에서 내몰아 버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영혼을 파괴한다.
- 한편으로, 에드워즈는 “잘못된 정서들의 나쁜 결과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것은 우리가 참과 거짓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서들은 필수적이지만, 잘못된 정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식별할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청한다.

3. 열두 가지 부정적인 표지

- <종교적 정서론>의 두 번째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정서들이 은혜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표지가 아닌 것”을 말해주는 열두 가지 부정적 표지들을 제시한다.
- (1) “종교적 정서들이 매우 대단하거나 매우 고양 된다는 것은 표지가 아니다.” 이것은 <구별하는 표지>의 첫 번째 부정적 표지와 유사하다.
- (2) “몸에 대단한 효과를 나타냈다는 것이 그 정서가 진정한 종교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표지는 아니다.” 이것도 <구별하는 표지>의 두 번째 부정적 표지와 같다.
- (3) “종교에 관한 것들을 말하는데 있어서 유창하게 하고, 열정적이게 하고 풍부하게 한다는 것이 그 정서가 진정으로 은혜로운 정서라는 표지는 아니다.” 이것도 <구별하는 표지>의 세 번째 부정적 표지와 같다.
- (4) “사람들이 그 정서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거나, 자신들의 계획대로 그 정서가 일어나도록 흥분시키지 않았다거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 정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 그 정서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표지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은 그 발휘되는 방식과 상황이 매우 다양하다고 말한다.
- (5) “정서들이 놀랍도록 성경 구절을 정신에 불러일으키면서 왔다는 것이 그 종교적 정서가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이라는 표지는 아니다.”
- (6) “그 정서들 안에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 종교적 정서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표지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더 우월한 것이 있을수록, 그것을 가장한 것이 나올 것이다.” 비록 사랑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은혜 중 대장”이고 “모든 진정한 종교의 생명, 본질, 그리고 요약”이지만, 그것 역시 가짜가 나올 수 있고,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이 표지는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다섯 번째 긍정적 표지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 (7) “어떤 사람이 지닌 종교적 정서가 그 종류가 많고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종교적 정서를 갖고 있는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종교적 정서에는 그에 해당하는 가짜들이 있다.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다양한 기능들, 원리들 그리고 정서들은 하나의 원천에서 나오는 많은 통로들이다.” 그러므로, 그 나타나는 것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경험과 거짓된 경험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 (8) “위로와 기쁨이 각성과 양심의 가책 뒤에 따라왔다는 이 어떤 순서를 가지고 정서의 본성을 결정할 수는 없다.” 방법과 순서가 회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마귀는 하나님의 영이 일으키는 모든 구원의 작용과 은혜들을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은혜를 준비하며 오는 그런 작용들도 흉내 낼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그 열매들을 생산해내는 성령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 (9) “사람들이 종교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적 의무에 열심히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지닌 종교적 정서 안에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표지는 아니다.” 참된 종교가 사람 안에 그런 종교 행위 안에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적 종교 행위에 지나치게 마음을 쏟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 (10) “사람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종교적 정서의 확실한 본질로 알려질 수는 없다.” 이 표지는 아홉 번째 표지에 포함되지만, 에드워즈는 더욱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적대감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친절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무가치함으로부터 부르짖을 수 있고,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11) “그들이 경험한 것이 거룩하고 그들이 좋은 신분이 되었다는 대단한 확신을 갖게 만든 것이 그들이 지닌 정서가 옳은지 그른지 알려주는 표지는 아니다.” 사람들이 대단한 확신을 품은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위선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그들이 대단한 자기확신을 지니고 있다고 성인이라고 평가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 (12)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들이 매우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진정한 종교적 정서의 본질인지를 알려주는 표지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들에 의해 사람들을 판단하는 방식이 불확실하고 속아 넘어가기 쉽다고 강조한다. 참된 성인이라고 해서 누가 경건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식별의 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 열두 가지 부정적 표지들 사이에서, 여덟째 표지, “정서의 순서”와 열두 번째 표지,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에드워즈의 정서의 순서에 대한 견해는 회심의 경험들의 차례(sequence)에 대한 청교도의 이해와 다르다. 이반 하워드에 따르면, 청교도 전통에서는 구원받은 경험의 식별은 경험된 정서의 차례와 같다. 성령의 보편적(common) 영향과 구원적(saving) 영향에 대한 청교도의 구분은 알아차릴 수 있는 성령의 예비적 역사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보편적 영향은 초기 회심보다 앞서서 성령께서 초청하고, 믿음을 주고, 감동을 시키고, 설득하는 모든 움직임들을 가리킨다. 구원적 영향은 성령께서 중생과 그 이후에 성취하는 변화의 사역을 가리킨다.” 청교도들 사이에서 발전된 많은 구원의 도식(schemata) 가운데, 구원적 회심 앞에 감지할 수 있는 확신, 두려움, 또는 굴종의 경험들이 선행된다는 것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에드워즈는 이 단계들의 순서와 명칭에 대해 고심한 끝에 성령의 열매를 생산해내는 방법들보다는 성령의 열매들의 본질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하워드에 의하면, “좋은 식별은 성령의 역사의 주도권과 우리 자신의 범주의 나약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순서에 대한 에드워즈의 관점으로부터, 스미스는 두 가지 반향(repercussions)을 찾아낸다: 첫째, 에드워즈는 구원이 어떤 정해진 순서가 있는 과정이라는 많은 청교도들의 설명의 유효성을 부정한다. 둘째, 에드워즈의 관점의 궁극적 근거는 성경과 함께 경험이다.
- 두 번째로, 외적인 판단은 신뢰할 수없고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에드워즈의 관점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 영들의 식별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오직 자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보이는 교회 내부의 보이는 성인들 사이에서 용납의 근거를 형성하는 ‘공적 자선’(public charity)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그 사람의 종교적 지위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내포해서는 안된다.”

4. 열두 가지 긍정적인 표지

- 에드워즈가 <구별하는 표지>를 쓴 후에 더 “구별되고 확실한” 표지를 기술할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의 감각을 불안정한 요소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에드워즈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 스미스는 <종교적 정서론>의 열두 가지 긍정적 표지들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정서들 그 자체, 정서들의 근거, 그리고 정서들의 결과. 하워드는 정서적 움직임의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살피는 청교도적 자기 성찰을 연상하며 스미스의 이 구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에드워즈가 한 말들을 분석한다:
- (인용) 에드워즈는 처음 네 개의 표지들을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한다: “...로부터 일어나는”(risign from) 또는 “근거”(foundation).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표지는 정서들이 어떤 특성들과 “수반되어 있다”(attended with)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덟째와 아홉째 표지는 일곱 번째 표지를 보충하거나 확장시킨다. 그래서, 정서들이 “결부되어 있다”, “낳는다,” “증진시킨다,” “...의 지배를 받는다,” 또는 “...와 수반되어 따라온다” 등으로 묘사된다. 열 번째 표지는 균형(symmetry)과 조화(proportion)을 이루며 확장시킨다.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와 열두번째 표지들은 정서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결과들, 즉 정서들 내에서의 변화를 따르는 경향을 말하거나 (“더 높게, 더 많이” the higher, the more), 정서들이 발휘된 결과(exercise and fruit)를 가리킨다.
- 스미스와 하워드의 제안을 바탕으로 열두 가지 표지들을 세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첫 번째부터 네 번째 표지들, (2)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표지들, (3) 열한 번째부터 열두 번째 표지들.

(A) 정서들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 (1) “진정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정서는 마음 안에 일어나는 영적이고(spiritual), 초자연적이고(supernatural), 거룩한(divine) 영향들(influences)과 작용들(operations)로부터 일어난다.”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거룩한 작용들”이 거룩한 정서의 기반이다. 영적이란 육적이고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과 반대되는 말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그 마음에 “생명의 씨앗 또는 생명의 샘”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그 영혼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기쁨”에 참여하게 한다. 초자연적이란 “자연적인 것과 정도와 상황에 있어서 다를 뿐만 아니라, 종류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다.” 종교적 정서를 거룩하다고 한 이유는 그로 말미암아 성인들이 “거룩한 본성에 참여자”가 되고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의 영적 아름다움과 행복”에 참여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새로운 내적 인지”(new inward perception) 또는 “새로운 영적 감각”(new spiritual sense)이란 말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거룩해지기 전에 그들의 마음이 속해 있던 어떤 것과도 그 본성과 종류에 있어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적 감각과 그에 수반되는 새로운 의향은 “본성의 새로운 원리들”(new principles of nature)이 된다. “본성의 원리는 본성 안에 놓여있는 기반이다.” 새로운 영적 감각은 이해력과 의지의 새 기능이 아니라, 영혼의 본성에 있는 새 기반으로서 이해력과 의지라는 같은 기능을 새롭게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필수적인 기능들, 즉 이해력, 의지 그리고 정서들을 파괴하지 않는다.
- (2) “은혜로운 정서의 첫째가는 객관적 기반은 거룩한 것들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이다.” 진정한 사랑, 감사 그리고 기쁨은 이 기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은혜로운 정서의 원천인 “기독교적 사랑”은 하나님의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에서 나온다. 진정한 성인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일들, 하나님의 방식들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사랑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탁월성과 영광 때문이다. 자기 사랑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원리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 역시 같은 원천, 즉 거룩한 것들의 탁월한 본성에서 나온다. 진정한 성인은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이 지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본성에 대한 달콤한 생각에서 나오는 영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다.
- (3) “진정으로 거룩한 정서들은 우선적으로 거룩한 것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들이 지닌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거룩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룩한 정서의 시작이고 원천이다.”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진실하심, 신실하심, 그리고 선하심과 같이 하나님이 도덕적인 대리인으로서 발휘하시는 특징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룩하심”은 지적인 존재가 지니는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아우르는 말이다. 은혜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특징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된 그 특징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향한 에드워즈의 접근법의 미학적 특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정서는 식별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 (4) “은혜로운 정서는 거룩한 것들을 바르게 영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각성된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은혜로운 정서의 네 번째 기반은 “영적 이해력”(spiritual understanding)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영적 이해력은 감지할 수 있는 미학적인 지식이다. 영적 이해력은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으로 불리며 사색적 지식(speculative knowledge)과는 다르다. 영적이해력은 진정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마음의 감각으로서의 영적 이해력이 매우 미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상현 교수는 “미학적 감각은 인간 전 존재의 통합된 일치의 한 기능이다”라고 표현했다.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사람은 마음의 거룩한 맛과 의향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 “그는 쉽게 선과 악을 구분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적절한 사랑스러운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즉각 안다.” 영적 지각으로서의 영적이해력은 “다른 모든 다섯 가지 감각을 합쳐서 거룩한 것을 접촉하게 하고 갈망하게 하는 여섯 번째 감각(a sixth sense)이다.”
- 영적 이해력이란 표현을 통해, 에드워즈는 극단적인 부흥유형의 종교가 지닌 반지성주의적 편견을 거부하려고 한다: “거룩한 정서는 빛이 없이 열만 내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여기에서 이해력이라는 말을 마음의 경향(inclination of the heart)이라는 감각적 요소를 포함시키면서도 합리성을 지닌 기준으로 사용한다. 이해력이 없으면, 정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워드에 의하면, 마음의 감각 또는 영적 실재의 새로운 지각으로서의, 영적 이해력은 에드워즈의 식별에 있어서 “인식론적 기초”(the epistemological foundation)이다. 마이클 J. 맥클리몬드에 의하면, “영적 감각은 어떤 것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라보는 어떤 방식이다.”

(B) 이 정서들에 수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 (5) “진정으로 은혜로운 정서들은 거룩한 것들의 실재성과 확실성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합리적이고 영적인 확신을 수반한다.” 영적 확신(spiritual conviction)은 영적 이해력으로부터 나온다. 에드워즈는 영적 확신의 두가지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직접적인 방식과 간접적인 방식. 첫째, 영혼은 어떤 것들의 거룩성에 대해 일종의 직관적 지식(intuitive knowledge)을 가질 수 있다. 둘째, 영적 이해력에 의해, 거룩한 것들의 진리에 반하는 마음의 편견이 제거되고 영적 이해가 이성을 긍정적으로 돕는다.
- (6) “은혜로운 정서들은 복음적 굴종(겸손)을 수반한다.” 복음적 굴종(겸손)(evangelical humiliation)은 “책임감과 함께 갖는 불충분함, 비열함, 가증함의 감각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들이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 초&#45780;.” 그아름답다는 것을 감지 하는데서 나온다. 그것은 위대한 기독교적 자기 부인의 의무에서 주요한 요소이다. 반대로, 영적 교만은 사람” 그하여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종교.” 그자기가 성취한 것을 높게 보도]그만들고 그그자체 그우쭐하게 만든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사랑은 겸손하고 부서진 마음(broken-hearted)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 (7) “은혜로운 정서들은 본성(nature)의 변화를 수반한다.” 오직 창조주의 힘만이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 회심이란 죄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위대하고 우주적인 인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회심은 또한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본성의 변화는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수행되는 것이다; 영광 안에서 완전에 이를 때까지.” 그러므로, 식별 또한 계속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8) “진정으로 은혜로운 정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같은, 비둘기같은 영과 성정(temper)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 온유함, 조용함, 용서함과 자비의 영을 소유하고 증진시킨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용기(fortitude)는 마음(mind)에서 제멋대로 구는 정념들을 가라앉히고 좋은 정서와 성향들을 꾸준하게 따른다.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정념들과 진정한 기독교인의 열심을 비교한다. 정열적으로 폭력적으로 발휘되는 정념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잘못된 만용이다. 반대로, 거룩한 사랑 또는 기독교인의 자선의 열기, 즉 달콤한 화염의 열기와 열정인, 그리스도인의 열심은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담대함이다.
- (9) “은혜로운 정서들은 마음(heart)을 부드럽게 하고, 영의 그리스도교인적 부드러움을 수반하고 따라나온다.” 은혜로운 정서들은 돌 같은 마음을 어린 아이의 살처럼 부드러운 살(flesh)의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진정한 참회자(penitent)의 마음은 불을 두려워하는 화상입은 아이처럼 매우 민감하다.
- (10)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은 아름다운 균형(symmetry)과 조화(proportion)를 수반한다.” 에드워즈는 조화는 그 정서들의 성화가 우주적인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성인들 안에서는, 거룩한 소망과 거룩한 두려움, 기쁨과 경건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 간다. 은혜로운 정서들은 다양한 정서들 가운데 일치성(uniformity)과 균형(balance)으로 이루어져 있다.

(C) 이 정서들로부터 나오는 열매는 무엇인가?

- (11) “은혜로운 정서가 더욱 고양될수록, 영적 달성(spiritual attainments)을 위한 영적 식욕과 영적 갈망이 더 증가된다.” 반대로, 잘못된 정서는 그 자체로 만족하며 머무른다. 은혜로운 정서들은 계속 자라가고 갈망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한 성인이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할수록, 그는 그분을 더 사랑하기 원하고 죄를 더 싫어하게 된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더 큰 영적 발견들과 영적 정서들을 갖게 될수록, 그는 더 은혜와 자라는데 필요한 영적 양식을 구하는 착실한 거지가 된다.” 은혜로운 정서는 또한 자기 충족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영적 즐거움(enjoyments)은 영적 식욕이 기대하는 것에 답해주고, 그들의 감사와 즐거움(pleasure)은 영원하다.”
- (12)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은 기독교인의 실천 안에서 발휘되고 열매를 맺는다.” 이 표지가 열두 가지 긍정적인 표지들 가운데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인의 실천”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참되고 구원하는 은혜의 가장 중요한 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실천은 은혜의 모든 표지들 가운데 대장이다. 신앙고백자의 신실함을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의 양심에 증거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실천은 세가지를 내포한다: 순종, 착실함(earnestness)과 부지런함, 인내(perseverance).
-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외적 표현들(external manifestations)과 밖으로 나타나는 것(outward appearances)을 강조한다: “내부로 향한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몸의 행위들의 방향을 잡고 지시를 내리는 의지 안에서 은혜가 실제적으로 발휘되는 것과 관련해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고 의도되어 있다.” 에드워즈의 외적 표현들로서의 실천에 대한 강조는 청교도의 내적 삶에 대한 강조와 약간 다르다. 에드워즈는 열두번째 표지에서 행위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기독교인의 경험과 실천, 그리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인의 성품을 통합하고 있다. 그렇다고 에드워즈의 실천 옹호가 일에 의한 칭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에 내주하는 성령은 그 사람의 본성과 행위에 변화를 일으킨다.
- 마지막으로, 이 표지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회심이 발전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진정한 성인은 이미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도 다시 잘못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식별은 평생에 걸친 과정이고 진정한 성인들을 위한 과제이다.
- 결론적으로, 멕더모트는 열두가지 표지들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표현한다: 거룩한 초자연적 원천, 하나님께로 이끌림, 거룩성의 아름다움을 보기, 새로운 앎, 깊게 자리잡은 확신, 겸손, 본성의 변화, 그리스도같은 영, 하나님을 두려워함, 균형,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 그리고 기독교적 실천 (굴복과 인내).
- 스미스는 <종교적 정서론>이 세가지 기본적인 기여를 했다고 본다. 첫째, 에드워즈는 새로운 감각(new sense)과 새로운 본성(new nature)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삶의 두드러진 종교적 차원을 새롭게 했고, 그럼으로써 종교의 축소를 막았다. 둘째, 에드워즈는 이해력을개인의 직접적 경험과 관련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그는 “이해력을 독특한 개인의 경험을 무시하는 순전히 이론적인 힘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 안에서 보존될 수 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는 비록 경건이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은 궁극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지만, 경건이 어떻게 그 진정하거나 거짓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들 안에서, 합리적인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부흥회적인 종교에 대한 현재의 관심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반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었다.

5. <종교적 정서론>에 나오는 식별

- <종교적 정서론>에서, 특별히 열두가지 긍정적 표지들 안에서,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것들 몇 가지는 독특하고 주의를 기울여볼만하다: 정서의 중요성; 회심의 기반으로서의 영적 이해력 또는 마음의 감각; 식별의 주요 요소인 미학적 요소; 구원하는 은혜의 주요한 표지로서의 기독교적 실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식별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개인 안에 있는 정서들이다. 정서들에대한 자기-식별 그리고 신앙고백 하는 사람들의 정서들을 검토해보는 것은 식별에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 특별히, 정서와 영적 이해력이란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식별이 정서적(affective)이면서 동시에 이지적(cognitive)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한 사람의 경험안에 있는 정서적인 요소들과 이지적인 요소들을 각각 강조하면서 동시에 둘 다를 통합한다. 이에 대해 이상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용적이면서 적극적인 감각이란 확장된 개념을 통해 에드워즈는 감각과 정신적 행위를 최종적으로 통합했는데, 이것은 자명한 지식(self-evident knowledge)은 감지할 수 있는 지식(sensible knowledge)이 되어야한다는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 다른 한편으로, 식별은 식별하는 사람의 성숙성에 의존한다. 정서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옳게 판단하는 식별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D. <구별하는 표지>와 <종교적 정서론> 비교

- <구별하는 표지>와 <종교적 정서론>은 그 구조에 있어서 비슷하다. 둘 다 표지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부정적인 표지들과 긍정적인 표지들 사이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두 논문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도중에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어떻게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 <구별하는 표지>와 <종교적 정서론>이 그 구조와 식별의 과정에 있어서 비슷하다고 해도, 그들은 분명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앞의 논문은 “무엇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라는 참되고, 확실하고, 구별되는 증거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안에서 보이는 어떤 작용을 안전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뒤의 논문은 “하나님의 영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성과 표지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것들이 구원하는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마음(minds)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구분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 하워드는 식별의 대상에 있어서 두 작품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별하는 표지에서는, 식별의 대상이 정서적인 경향이다; <종교적 정서론>에서는, 개인에 의해 경험되는 정서들 그 자체가 식별의 대상이다.”
- 또, 에드워즈가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 작품에서 다르다: <구별하는 표지>에서는 반대자들이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인 반면에, <종교적 정서론>에서 에드워즈의 강력한 공격을 받는 사람들은 “열심주의자들”이다.
- 또, 성령의 역사들 가운데 초점을 두는 부분도 두 작품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구별하는 표지>에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모든 역사들과 다른 영들의 역사들의 차이점을 다루는 반면, <종교적 정서론>에서는 에드워즈가 성령의 은혜로운 또는 구원하는 영향력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한다. 성령의 구원하는 영향들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원칙들을 세우는 것이 에드워즈의 목적이었다.
- 마지막으로, 이 두 논문에서 식별의 기준은 비슷해 보이지 점이 있지만, 분명히 구분된다. 두 논문에서 식별의 기준을 찾기 위해 에드워즈는 철저하게 성경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워드에 따르면, 식별의 기준에 있어서 다른 점들이 있다. <구별하는 표지>에 나오는 긍정적 표지들은 “예수를 높임, 성경을 존중함, 사랑의 증가와 죄가 줄어듬”과 같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표지들이다. 그러나, <종교적 정서론>에 나오는 기준들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에드워즈는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오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유형, 즉 은혜로운 또는 구원하는 역사 (gracious or saving work)와 그 밖의 다른 것들 사이를 구분하고 있다. <종교적 정서론>에서는 성령의 변화시키는 역사에 초점을 맞춘 표지들만 식별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월터 V.L. 에버슬리는 감정 과잉(emotional excesses)의 측면에서 두 작품의 차이점을 논한다: <구별하는 표지>와는 달리, <종교적 정서론>은 감정적 과잉으로 이끄는 성화되지 않은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한다.
- 필자가 보기에, <구별하는 표지>와 <종교적 정서론>의 차이점들은 식별하는 사람으로서 에드워즈가 시도하는 식별의 발달적인(developmental) 측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식별에서 성령의 구원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식별하는 표지>에서 에드워즈는 부흥을 하나님의 역사로 옹호하면서 부흥에 대한 비판들을 거절하고 있다. <종교적 정서론>에서는 공동체적 경험으로서의 부흥현상 보다는, 개인 안에 있는 종교적 경험들, 즉 종교적 정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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